한국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전망-유해석 선교사
** 지난번 소망인교회에 오셔서 말씀 전해주신 유해석 선교사님의 글을 올려봅니다. 시간 되실 때 한번 읽어보세요. 도움이 되실겁니다. 점차 거세지는 이슬람 종교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기독교를 자성하게 됩니다. 옳은 것을 가지고 더 담대하고 지혜있게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겠습니다. 단순히 이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대처하며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주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알고 힘써야 하겠지요. 한세완 목사
한국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전망
유해석1)
들어가는 말
최근 세계통계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는 약 73억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23.2% 즉, 약 16억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2)전 세계 인구 다섯 명 가운데 한명이 이슬람 종교를 가진 무슬림(Muslim)이다. 지난 14세기 동안에 서구와 이슬람은 경쟁과 긴장을 동반한 대결의 역사였다. 그러나 한국역사를 돌아보면 이슬람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되어 왔다. 최근에는 다문화와 함께 이슬람은 더욱 알려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얼마 전 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이슬람 금융을 통해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종교이다. 한국에게 이처럼 이슬람이 생소했던 이유는 아마도 지리적 위치와 획일적인 문화 때문일 것이다. 이슬람이 발흥했던 아라비아 반도는 지금도 한국에서 항공편으로 약10시간 정도가 소요될 정도의 거리이다. 그렇기에 과거 아라비아 반도에서 한국까지 이슬람이 영향을 미치기에는 교통편이 발달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획일적인 한국 정서에 외래 종교나 문화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이슬람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웠다.
한국과 이슬람의 관계는 한국의 고대 문헌 등에서 교류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역사에서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아랍인들을 만나게 된 문헌의 기록은 신라 시대부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세력이 미미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이슬람은 낯선 존재였다. 그 당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한국에 왔다기보다는 교역이 더 큰 목적이었겠지만, 한국과의 접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외국인의 유입증가와 함께 이슬람은 한국에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은 수쿠크(Sukuk) 법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사회 전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슬람이 한국에 어떻게 처음 접촉했는지, 한국역사 속에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내 이슬람의 현황을 파악해서 우리 곁에 얼마나 성큼 다가와 있는지를 알아보고,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대안을 세워보고자 한다.
I. 한국이슬람의 어제
1. 통일 신라에서 18세기 말엽까지
1) 신라시대와 이슬람
한국과 중세 아랍인과의 접촉은 아랍 고전의 여러 문헌들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최초로 아랍 사회에서 한국이 언급된 나라는 ‘신라’였다. -아랍어에서 신라를 뜻하는 이름은 ‘al-Shila’인데, ‘al’은 관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Sila’라는 음역은 ‘신라’라고 올바르게 사용되었다.3)- 중세 아랍인들의 문헌에는 신라의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9세기 중엽에 술라이만(al-Sulaiman)이라는 아랍상인이 살았는데, 그는 ‘중국과 인도의 소식(Akhbar al-Sin wal-Hind, A.D. 851)'에서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서 신라의 존재가 이미 아랍인들에게 알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술라이만이 밝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해안에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그곳의 주민들은 피부가 희다 그들은 중국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 한다. 우리 동료들 가운데 아무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 다. 그들은 또한 흰 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4)
페르시아 우편 관리인이었던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dadbid)는 자신의 저서 ‘도로들 및 왕국들 안내서’에서 신라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구히 정착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이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 곳의 아 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5)
중세의 지리학자인 이드리시(al-Idrisi)는 ‘먼 나라를 종횡할 꿈을 가진 자들의 산보(Nuahat al-mushtaq fiikhtiraq al-afaq)'에서 신라를 소개하고 있으며,6)세계지도에 신라를 섬나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지도는 서양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등장시킨 벨호(B.Velho)의 세계지도보다 408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랍이 서양보다 먼저 신라와 접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 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 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7)
이처럼 중세의 아랍인들에게 있어서 신라는 매우 아름다우며, 금이 많은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다. 또한 아랍인들은 신라에 오면 정착하여 떠나기를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미 아랍 사회가 한국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슬람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찾아볼 수가 있다. 아랍 지역에서 신라로 무역을 하기 위해 왔을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아랍 지역으로 갔던 내용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문헌 이외에도 경주에 있는 무인석상은 신라시대에 아랍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시 외동면 괘릉리에는 원성왕(元聖王, 8C)으로 추정되는 괘릉이 있는데, 그 옆에 무인석상이 하나 서 있다. 보물1427로 지정되어 있는 이 무인석상은 신장이 약 2m 50cm쯤 되며, 곱슬 수염과 곱슬 머리의 늠름한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그 머리에는 무슬림의 전통복장인 터번을 쓰고 있다. 이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그 모습은 아시아 계통이라기보다는 중세 서역인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안강의 흥덕왕(興德王, 9C)능에도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이 있는데 그 모습은 괘릉의 무인석상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무인석상은 당시 중국 매우능묘에 서역 무인들의 모습을 호인용으로 만든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왕릉의 위엄과 수호적인 역할의 기능을 하였다.8)이를 토대로 신라 왕조 때 이미 서역인들의 존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신라의 왕조와 호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인 ‘처용설화(處容說話)’에 등장하는 처용의 일행은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 5년(879) 3월에 개운포(開雲浦)9)에 나타났는데 이들의 용모는 아시아 사람들이 아니라 아랍 무슬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처용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개운포에 등장하는 처용을 일관(日官)10)이 호전적으로 묘사함에 따라 헌강왕은 이들을 환영하고 서울에서 집과 벼슬을 주어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에도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술들로 보아서 처용은 개운포를 통해서 신라와 접촉했던 이방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방에서 동해를 거쳐 신라에 접촉하였으며, 처용의 모습은 무성한 눈썹, 우그러진 귀, 붉은 모양, 우뚝 솟은 코, 밀어나온 턱, 숙어진 어깨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처용이 동양 사람이 아니라 아랍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처용설화는 아랍 사회가 신라와 접촉했다는 것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신라인도 아랍에 접촉했던 기록이 있다.
신라의 대덕고승인 혜초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아랍에 갔던 인물이었다.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중앙아시아에 관한 견문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작성하였다. 혜초는 아랍국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가 방문할 당시 아랍 제국은 칼리프 시대(632-661) 후인 우마이야왕조(661-750)시대였다.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겼는데, 혜초가 묘사한 소불림국(小佛臨國)은 당시 이슬람 제국의 수도였던 다마스커스를 의미한다.11)혜초는 아랍 사람들이 입고 있는 복장을 묘사하면서 “헐렁한 적삼을 입고 한 장의 모직 천을 걸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슬람의 전통복장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혜초는 대식국을 가리켜 불법을 알지 못하는 나라이며, 이슬람 신앙을 가졌기에 알라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12)신라와 아랍 간에 있었던 문명의 교역에 대한 증거로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의 ‘제도로 및 제왕국지(845)’를 들 수 있다. 그는 신라의 지리적 위치를 밝히고 신라와의 무역의 목록들을 나열하고 있다. 비단, 검, 사향, 침향, 말안장, 초피, 도기, 범포, 육계 등은 신라가 수출한 물품들이었고, 아랍이 신라에게 수출한 물품은 유향과 안식향을 비롯한 아랍산 향료, 신라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각종 유리기구, 일반서민들도 애용하던 구슬 같은 기호품, 단검이나 토용 등이었다. 신라 고분인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동 98호 남분 및 북분에서는 20점 가량의 유리기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랍계 상인들을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13)이러한 교역 물품을 통해서 아랍과 신라 사이에 문명의 접촉과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시대와 이슬람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시대 때보다 아랍과의 교류가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 때에는 원제국을 통하여 아랍문명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처음으로 움마(Ummah,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다.14)기록상 최초로 한반도에 진출한 무슬림은 고려 현종(顯宗) 15년인 1024년에 등장한다. 고려사 현종 15년의 기록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9월 을미일에 김인위(金因渭)를 상서 우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가 이내 사직케 하였다. 갑인일 에 흑수말갈의 아이고(阿里古)가 우리나라에 왔다. 9월 대식15)국의 열라자(悅羅慈) 등 1백 명이 와 서 토산물을 바쳤다.16)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서 고려사회 내에 무슬림 상인들이 무역을 주목적으로 일시에 백 명 이상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의 형태로 방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이미 고려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역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와 아랍간의 교류는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항로를 통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랍 상인들이 대거 고려로 교역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송나라와 아랍과의 국제무역의 번성과 고려와 송간의 원활했던 교역관계를 기반으로 하는데, 당시 송대는 이슬람 세력 팽창의 시기로서 무슬림 상인그룹에 의한 국제무역의 번성기였다.17)따라서 아랍은 송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고려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물의 교류는 주로 공(公)무역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식 상인들이 고려에 거주하는 동안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조정에서 거행된 주요 국가행사에 외국 사절들과 함께 참석할 정도로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왕실과의 긴밀한 공(公)무역관계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고려 사회 안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姓) 중에도 고려시대 때 시작된 성이 있다. 이러한 성(姓)들 가운데에는 당시 무슬림들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있다. 무슬림들 중에 일부는 고려에 귀화하였는데, 이를 통해 성(姓)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삼가(三歌) 장순룡(張舜龍)은 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妃)인 제국공주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는데 그는 투르크계 위그르 출신의 무슬림으로서 한국에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고려사 제 123권을 보면 장순룡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장순룡은 근본이 회회족이며 처음 이름은 삼가이다. 그의 부친 장경은 원나라 세조를 섬겨 필도적 벼슬을 했다. 장순룡은 제국 공주의 겁령구로 와서 낭장 벼슬을 받았고 여러 관직을 거쳐서 장군으 로 승진되면서 이 성명을 고쳤다.18)
여기에서 사용된 삼가의 의미는 세 번째 형으로서 투르크계 위구르인을 지칭한다.19)장순룡에 대한 이야기는 “덕수 장씨 가승보”에서도 등장한다. 장순룡은 본래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관리였으나, 원나라의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오게 되었다. 그는 고려 사회에 정착하면서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는데, 고려와 원 사이의 외교조정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충렬왕과 원의 세조에게서 신임을 얻어서 두 나라 모두에게서 높은 관직을 받게 되었다. 장순룡의 후손들은 25대에 걸쳐서 고려와 조선조에 관료와 학자, 무관의 관직을 이어갔는데 지금은 경기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해 있다.20)
민보(閔甫)라는 인물도 고려 사회 안에 귀화한 무슬림이었는데, 그는 고려사 제31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민보는 충렬왕 1294년에 장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의 조공을 드리러 갔는데 1299년에는 대장군의 신분으로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1301년과 1303년에는 대호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21)또한 1305년에 상호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는데 고려사에 나타난 민보는 고려 사회에서 무관을 담당하는 관료로서 원나라의 조공을 드리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민보는 무슬림 사람으로서 고려국으로 귀화함으로서 무관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설손(偰遜)은 고려사 제 112권에 등장하는 귀화한 무슬림이다. 설손은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황제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학자였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왕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고려 사회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고려사 속에서 나타난 장순룡, 민보, 설손과 같은 인물들은 고려 사회 내에서 귀화했던 무슬림들이다. 이들은 조정의 지원을 받으며 고려 사회 내에서 대내외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관료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무슬림 신앙이 얼마나 존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사회에 귀화해서 살았던 이들이 무슬림 신앙과 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슬람은 하나의 사회ㆍ경제적 세력으로 고려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개성과 그 주변에 거주했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거주했던 무슬림들이 조정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회 내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들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고려의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 조선시대와 이슬람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고려시대에 이어서 이슬람과의 교류가 계속 되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무슬림들의 종교 행위가 보장되었으며, 이슬람의 과학기술과 공예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슬람과의 문명의 교류에 관련한 서술이 잘 나타나 있다.
조정에서는 회회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으며, 조선 사회 내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도록 하였다.22)또한 무슬림 상인뿐 아니라 무슬림 종교 지도자를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종교의식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지도자가 거주하였을 정도로 이슬람은 조선시대에 정착될 수 있었다. 조정은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회회 사문들의 생활을 지원을 함으로서, 이들의 복지와 생계를 도왔다. 회회 사문들의 존재는 조선시대 사회 안에 무슬림들이 움마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고, 조정이 이슬람의 종교를 호의적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이슬람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세종이 즉위했던 원년에 회회인들은 공식적인 조하의 자리에서 불교의 승도와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3)이를 통해서 조선의 조정이 불교와 이슬람을 통솔하고 있으며, 이슬람은 이미 조정이 인정하는 하나의 공식적인 종교임을 알 수 있다. 회회인들이 임금을 찬양하는 송축 의식을 하였다는 것은 조정의 공식적인 행사와 의례에서 무슬림들을 포함시켰을 정도로 중요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이 왕세자와 문관과 무관의 신하들과 함께 조정의 조례행사를 실시할 때에 귀화한 회회인들이 조하에 참여하였는데,24)이는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회회인들이 귀화했었으며, 이들은 조정의 중요한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문물들과 기술들을 교류하는 수준으로서, 고려시대보다 더 활발한 이슬람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별히 이슬람력(Islamic calendar)은 조선의 역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해 칠정산내외편이 만들어지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조선 세조 때에는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 수출하는 도자기 안료인 회청이 수입되었다. 이로 인해 청자를 넣은 청화백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청화백자의 등장은 도자기 공예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거주하였던 무슬림들은 주로 조정과 상류층 사회와의 교류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조정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위치는 중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였으며 조정과 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이 대중 속에 정착되지 못했고 결국 자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25)결국 이러한 지배층 중심의 성격은 민중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급변하는 대내외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 19세기 투르크계 무슬림들의 이주
이슬람은 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 때까지 한국과 문명을 교류하고 이슬람선교를 시도했다. 15세기 중엽 조선의 세종 이후 약 4세기의 공백기 후에 이슬람 선교는 19세기 말부터 다시 진행되었다. 1898년 러시아의 청조(淸朝)로부터 동청(東靑)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계기로 러시아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중국의 하얼빈(Harbin)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에 러시아 전역으로 이주하여 움마를 이루게 되었다.26)그 후 1915~1920년 사이에 제 1차 세계대전과 볼세비키 혁명을 계기로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국내에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1920~1940년 중반까지 200~250여명의 투르크인들이 한반도 전역으로 이주하여 이슬람공동체를 이루었다.27)
국내에 거주했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주로 의류 도·소매업을 중심으로 포목점과 양복점을 경영하였는데, 상업과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였다.28)그들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목포, 대전, 평양, 신의주, 청진, 홍남 등 전국에 걸쳐 이슬람공동체를 이루면서 종교적·문화적 활동을 지속해 갔다. 이들은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 이슬람 마을(Mahall-i Islamiyeg)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서울 시내의 중심가에는 이슬람 학교(Mekteb-i Islam)을 통하여 무슬림 자녀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29)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투르크 무슬림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계인들 및 고위 군부들과 밀접한 협력 관계를 추구하면서 무역과 상업 활동으로 인한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패망 이후로 불안한 국내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투르크 무슬림들은 1940~1950년간에 캐나다, 미국, 호주, 터키 등으로 이주하게 된다.30)이에 일제 치하를 겪은 우리 민족은 나라의 아픔을 끌어안고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만을 얻고자 하였던 투르크인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도 하였다. 결국 투르크 무슬림들은 한국에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못했고, 한국의 공동체 형성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3. 6․25 전쟁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다시 유엔군 소속으로 터키의 군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참전한 병력의 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여단 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당시 압둘가푸르 카라이스마일오울루(Adulgafur KaraismailogLu)라는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 이맘(Imam)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 등이 개종하였고, 이들은 1세대 한국인 무슬림들로 형성되었다.31)이후 김유도와 김진규는 1955년 9월 15일 ‘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함으로서 적극적인 이슬람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슬람 선교 활동은 교육에도 이르렀는데, 한국 전쟁 당시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여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활동을 하였고, 1956년 4월에는 ‘청진학원’을 설립함으로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무료로 실시하기도 하였다.32)
1956년 주베이르 코치(Zubeyr Koch)가 2대 이맘으로 부임하면서 입교자는 ‘208명’에 이르게 되었고, 1959년 이슬람협회 지도자였던 김진규는 서정길과 함께 이슬람 국가를 순방하면서 한국 이슬람의 실정을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였으며 1960년에는 한국 무슬림으로는 최초의 성지 순례자들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계속되는 지원을 통하여 1965년 4월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67년 3월 13일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Korea Islamic Foundation, KIF)’로 종교법인 등록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한국 이슬람의 중추적인 의결기구로서 활동하고 있다.
1970년 9월에 한국정부는 용산구 한남동의 1,500평의 땅을 이슬람 중앙성원 건립용 부지로 기증하였고, 이후 이슬람 국가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1976년 5월 21일 이슬람 성원의 개원식이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 이슬람은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1960~1970년대에는 한국 기업들의 중동 국가 진출을 계기로 3,700명이었던 이슬람 인구가 약 두 배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한국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슬람 대학 건립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1980년 5월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칼리드(Khalid)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과 한국 이슬람 대학 설립을 합의하였으며 경기도 용인 13만 평의 이슬람 대학 부지를 기증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슬람 교육 및 연구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1997년 ‘세계 무슬림연맹(Rabita)'과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주체로 무슬림 학자 20여명과 100여명의 국내외 이슬람 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의 이슬람 ― 역사와 문화적 조화의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렇듯 현대에 들어서 이슬람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한국 내에 무슬림들은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Ⅱ. 한국의 이슬람 오늘
1. 한국의 외국 무슬림 현황
1990년 이후에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 이슬람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한데는 외국인 인구가 유입된데 따른 것이다. 한국에 외국인이 유입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노동인력의 부족이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이후에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서서히 이름을 떨치기 시작할 무렵 국내노동시장에는 산업별 노동력 이동현상이 일어나면서 제조업 분야에 심각한 인력난을 초래하게 되었다. 반면 가난과 실업으로 노동력을 국제시장에 배출해야 했던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새로운 노동시장의 판로를 찿아 나서야 했다. 이러한 한국노동시장의 경제적 요구와 아시아 국가 노동인구의 요구가 서로 부합되면서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코리안 드림을 품고 새로운 노동 시장의 개척지 한국을 향해 밀려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1990년부터 한국의 노동시장에는 한국인 노동력의 수출량보다 외국인 노동력의 수입량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둘째, 한국의 저출산의 문제이다. 저출산은 저성장을 초래한다. 일하고 세금 낼 사람이 적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다. “우리나라는 1970년 4.53명의 출산율을 기록한 이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산아제한 정책으로 1980년 2.63명으로 급격히 줄었고, 1990년 1.60명, 2000년 1.47명, 2009년 1.19명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사실 1983년에 출산율이 2.1명으로 떨어졌을 때 신속히 조치를 마련해야 했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출산정책을 시작한 것은 2005년 부터였다. 204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가 400-500만 정도, 2050년에는 800-1,000만 정도가 줄어들게 되었다.33)
셋째, 고령화 현상이다. 고령화 사회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14% 이상인 사회를 말한다. 한국은 2018년에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2026년에 인구의 20%가 고령화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2050년이면 46%를 넘어설 것이다.34)고령화는 평균생활 수준의 하락, 사회 활력하락, 농촌 및 중소도시 경제 파괴등의 문제를 양산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령화 사회는 내수시장의 침체를 가져온다.
많은 전문가들은 저출산, 고령화로 인하여 한국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 한국의 인구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외국인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1990년 외국인들이 대거 유입됨에 따라서 2000년에는 재한 외국인 총수가 20만 명을 넘어서 인구 중 0.44%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2000년 대 증가세는 한층 가파르게 진행되어 2005년에는 드디어 전체인구의 1%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외국인 체류자는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2013년 말 157만 명을 기록해 4,920만 명인 국내 총인구의 3.2%를 자치하게 되었다. 저출산, 3D 업종 기피현상과 고령화등을 인하여 한국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국인 인구를 한국 전체인구의 약 14%(643만 명)을 수입해야 한다는 예측 등으로 외국인의 증가는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35)
〈표1〉 무슬림 외국인 국내 체류현황36)
권역별 | 외국인 체류 인원 | 무슬림 체류 인원 | ||||
남성 | 여성 | 총계 | 남성 | 여성 | 총계 | |
OIC 57개국 | 101,489 | 27,188 | 128,677 | 88,296 | 22,486 | 110,779 |
비 OIC국 | 504,094 | 440,032 | 944,126 | 15,557 | 11,671 | 27,226 |
총계 | 605,583 | 467,220 | 1,072,803 | 103,850 | 34,157 | 138,005(±20) |
출처: 2013. 12. 31. 법무부 통계월보
2. 한국 내 이슬람 선교 현황 (다와, dawa)
2005년에 한국이슬람중앙회에서 발행한 한국 이슬람 50년 자료집에 보면, 한국을 이슬람화 하기 위한 선교 전략은 이슬람 사원 건립, 국제 이슬람 학교 설립, 이슬람 문화센터 설립, 꾸란(koran)의 새로운 번역 추진, 이슬람 대학 건립, 이슬람 관련서적 출판 등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한국을 이슬람화 하기위하여 다각적인 면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 모스크
모스크(Mosque)는 이슬람의 예배처소이다. 무슬림들은 기도를 드릴 때에도, 매주 금요일에 행해지는 예배 시간에도 모스크를 방문한다. 그래서 모스크를 마치 개신교의 교회, 천주교의 성당, 불교의 절과 같이 여긴다. 유럽의 경우 지난 10년 동안에 모스크와 이슬람센터 건축이 4배로 증가하였다. EU(유럽연합) 안에 있는 나라에 이슬람 사원은 약 6,000개이다.37)미국에는 3500 개의 모스크가 있고, 매주 4-5개 씩 늘어가고 있다. 현재 국내에 건립된 모스크는 총 10개이다. 서울(한남동), 부산, 경기도 광주, 전주, 안양, 대구, 파주, 안산, 포천, 인천에 있다. 모스크 외에 이슬람 센터는 전라도 광주, 대전, 안산, 서울(송파구), 인천, 제주, 김포, 대구, 창원, 울산 등에 있다. 최근에는 ‘모스크’라는 단어 대신 ‘센터’라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를 감안해서 중복되는 지역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최소 7개 이상의 센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임시 예배소는 전국에 60여 개가 있다. 이러한 임시 예배소는 모스크로 발전되기를 기다리는 곳이다. 또한 이슬람의 한 종파인 시아파 무슬림들은 자체적으로 모임을 가지기 때문에 이를 포함하면 예배소의 수는 조금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스크는 예배처소 이외에도 다른 의미가 있다. 모스크는 알라의 땅을 표시하는 영역을 대표하며 단순한 건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이슬람 공동체의 중심이며,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38)즉,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 되는 것이다. 결국, 한국 내에 모스크가 세워졌다는 것은 한국 내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법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공식적인 이슬람 영토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2) 출판 사역
국내의 주요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보면, 아이들에서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읽을 수 있는 이슬람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우리는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이슬람관련 만화책이 출판되었다. ‘어린이 이슬람바로알기’(청솔), ‘무함마드와 이슬람 제국’(주니어김영사), ‘만화 이슬람의 모든 것’(주니어김영사), ‘이슬람이 알고 싶다’(중앙),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쓴 코란’(은하수미디어) 등이 그것이다.
195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약 50년간 이슬람 관련 도서는 70여 권이었다. 그리고 9.11 테러 이후 2012년까지 출판된 도서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출판된 150권 정도를 포함해서) 총 500권 정도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39)그런데 이렇게 이슬람에서 나온 책들은 이슬람의 어두운 부분은 가리고, 기독교와 유사한 내용을 담아서 이슬람의 알라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으로 홍보하고 있다. 1997년에 최영길 씨는 꾸란을 새롭게 번역하면서, ‘알라’라는 단어를 ‘하나님’으로 모두 바꾸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기독교인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꾸란의 새로운 번역들이 추진되면서 아랍어 원문이 주는 의미를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꾸란 4장 34절에서 “순종치 아니하고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인에게 남자는 “충고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고, 세 번째로는 가볍게 때려 줄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가볍게(lightly)”라는 단어가 없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는 꾸란의 일부 구절들을 완곡하게 번역하여 이슬람을 기피하려는 현상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국내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실린 세계사 부분에서 이슬람 관련 내용의 수정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그로 인하여 5차 교과서 개정(1989) 시에는 ‘유일신 알라’가 ‘하나님’으로 수정되었으며, 6차 교과서(1995)에서는 무함마드의 초상이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삭제되었다. 또한 현재에는 총 9개 출판사의 18권에서 170여 군데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40)이는 청소년들이 이러한 책들로 인해 왜곡된 이슬람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악영향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의 활발한 출판 사역에 비해, 기독교인으로써 이슬람에 대한 바른 시각을 제공하는 서적들을 출판하는 사역은 매우 위축되어 있다.
3) 이슬람 홍보
이슬람은 방송매체나 문화 강연 등을 통해서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2001년에 있었던 9.11테러 이후에, 이슬람은 폐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국내에서 이슬람의 좋은 면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위축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자신들을 잘 알릴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은 것이다. 먼저 방송매체에서는 2001년 MBC가 창사 40주년을 맞이해서 “이슬람”을 4부작으로 구성해서 방영하였다. 그 뒤를 위어 2004년에는 EBS에서 13부작 “이슬람 문화기행”을 방영하였고, 2006년에는 MBC에서 2부작 “터키의 길”을, 2007년에는 KBS 1TV에서 다큐멘터리 3일 “라마단”을, 2008년에는 논란이 되었던 4부작 “신의 길, 인간의 길”을 SBS에서 방영하였다. 그 외에도 “한국에서 무슬림으로 살아가기(KBS 2TV, 2009)”, “이슬람 최대 축제, 라마단(KBS 1TV, 2010)”, “프랑스의 선택, 부르카를 벗기다(KBS 1TV, 2011)” 등이 방영되었다. 그리고 한국이슬람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05년 이후 지금까지 아랍 문화를 알리는 아랍 문화 전시회, 아랍 문화 축전과 아랍 도서전 등을 비롯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이슬람의 보물전 등 크고 작은 이슬람 관련 전시회는 총 20여 개 이상 펼쳐진 것으로 보인다.41)이와 더불어 이슬람 문화센터를 개원하고 지속적인 강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국방일보,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등 주요 신문사나 잡지에 중동 관련 기사를 연재하면서 국내에 이슬람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중동과 아랍 문화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슬람으로의 포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Ⅲ. 한국 이슬람의 성장과 전망
그 동안 한국 이슬람 연구에서 한국이슬람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게 보았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이슬람이 이질적인 외래 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의 종교적 의무인 다섯 가지 실천 사항들이 한국의 사회문화에서 지키기 쉽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은 한국에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이슬람의 성장원인과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표2> 1930-2050년 세계인구와 무슬림인구 증가 비교
연도 | 1930년 | 1960년 | 1990년 | 2010년 | 2030년 | 2050년 |
세계인구 | 20억 | 30억 | 50억 | 69억 | 83억 | 90억 |
무슬림인구 | 2억 3백만 | 6억 6천만 | 10억 3천만 | 16억 | 22억42) | 25억43) |
1. 이민
이슬람 역사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태어나고 자랐던 사우디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A.D.610년부터 시작된다.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이민을 통하여 성장하였다. 한국의 이슬람 인구 가운데 가장 많이 차지하는 비율은 외국인 이주 무슬림들이다. 〈표 1〉에 의하면 한국에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는 이슬람 인구는 약 13만 8천 명이다.
이제는 한류, 경제교류, 관광, 또한 한국을 선교하기 위하여 이슬람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오고 있다. 한국정부 역시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하여 노동인력이 감소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한국에 합법적으로 정착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혹자는 중동이 한국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한국의 이슬람화는 지나친 생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인도네시아(2억 4천만), 파키스탄(1억 9천만), 방글라데시(1억 6천만)이며 인도의 무슬림 인구 또한 1억 6천만 명이다. 이들 국가는 모두 한국 인접국이다. 한국에 유학하러 온 이슬람권 유학생들도 급증하고 있다. 출입국 외국인정책 본부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어 연수와 일반 연수생을 제외하고, 2006년에 1,466명에서 2011년 12월 3,841명으로서 2006년 대비 262%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2. 다산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마지막 설교에서 “자녀를 많이 낳아서 이슬람을 번성케 하라”(Abu Dawood, Nisai and Hakim)고 말하였다. 또한 꾸란은 독신을 허용하지 않는다. “너희들 가운데 독신자는 결혼할지어다.”(꾸란24:32) 따라서 무슬림 여성은 모두 결혼하며 자녀를 많이 낳음으로서 이슬람은 성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꾸란의 명령(꾸란4:3)에 따라서 이슬람국가에서는 일부다처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또한 법적으로 명시된 네 명의 부인 이외에도 ‘오른손이 소유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는 하녀들과의 관계는 산하제한이 없는 이슬람 사회에서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를 가지고 왔으며, 이들 자녀들은 나면서부터 무슬림이 되어 이슬람의 인구성장에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영국의 경우 무슬림 여성은 평균 6-7명의 자녀를 낳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에도 평균 6명을 낳는다. 참고로 2013년 한국의 출산율은 1.18명 정도이다. 이는 2012년의 출산율 1.3명보다 하락한 것으로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4명 보다 적은 최저 수준이다.44)조희선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은 2012년 한국에는 약 4,000명의 무슬림 자녀들이 살고 있다.45)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무슬림 여성은 산아제한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 무슬림 2세들은 급속한 성장을 보일 것이다.
3. 결혼
꾸란에 의하면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 결혼을 하지만(꾸란 2:221), 무슬림 남성은 무슬림 여성, 유대인 여성,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꾸란 5:6) 타종교의 여성이 무슬림 남성과 결혼할 때에는 이슬람식 신앙고백을 해야하고, 자녀를 낳게 되면 이슬람법에 의하여 자녀는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양육권 아버지가 갖는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 영국여인이 무슬림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무슬림 남편은 아이들을 이슬람권으로 보내서 무슬림으로 성장한 다음에 다시 돌아오도록 한다. 이에 부인들이 자녀들을 찿으러 남편의 나라에 갔다가 유괴범으로 체포되어 그 나라 감옥에 갇히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2013년 6월 법무부 통계를 근거로 보면, 한국인과 결혼해서 국내에 머물고 있는 국제결혼 비자 체류자는 14만 8,746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가운데 주요 12개의 이슬람 국가 출신이 모두 4,935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46)그러나 이것은 주요 12개의 이슬람 국가만을 고려한 것이다. 현재 OIC(이슬람회의기구) 회원국은 57개국에 달하며, 회원국에는 속하지 않지만 전체 인구의 7% 정도가 무슬림인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도 있다. 이러한 나라들에서 온 무슬림들 그리고 그들과 결혼한 내국인들까지 계산하게 된다면 국내 무슬림 수는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4. 개종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 메카에서 시작된 이슬람군대가 중동과 북부아프리카를 점령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이등시민으로서 딤미(Dhimma)라고 불리우며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이름뿐인 기독교인들이 불평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발적인 개종이 늘고 있다. 영국의 내무부장관 재키 스미스(Jacqui Smith)는 2009년에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매년 5만 명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그 수가 40만 명이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이유는 이슬람의 교리가 기독교에 비하여 쉽게 되어있고, 무슬림들의 전투적인 선교활동, 그리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인하여 개종자가 늘어가고 있다. 〈표3〉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한국에서도 한국인 인슬람인구가 성장하고 있다. 한국인 이슬람 인구가 성장한 배경을 살펴보면, 1970년에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남동 이슬람 사원을 건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증가된 중동의 붐으로 인하여 6천 명 정도가 성장하였다. 또한 1990년 이후에는 외국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인하여 영향을 받은 한국 무슬림들이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2005년에서 2009년 사이에 약 3만 명이 성장하였다.
〈표3〉 한국인 이슬람 인구 현황
연도 | 1970 | 1976 | 1980 | 2005 | 2009 |
이슬람 인구 | 3,70047) | 15,00048) | 22,00049) | 40,00050) | 71,00051) |
Ⅳ. 한국이슬람화에 대한 제언
1. 정부에 대하여
다문화 인구가 늘어가면서 이슬람 인구도 급성장하고 있다. 이민 인구에 대한 정책은 권력을 지닌 정부의 영역이므로, 이 영역을 정부가 미래지향적으로 감당해 주지 않으면 한국은 장차 정치와 사회, 경제면에서 매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로마서 13장의 정부의 역할대로, 영국정부가 국회의원들과 기독교지도자들, 무슬림지도자들, 유대인 지도자들을 모아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를 다루었듯이 한국도 이런 대비를 해야 한다. ‘수쿠크(sukuk)’문제로 시끄러웠던 일이 어제 같지만, 이러한 도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최소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싱가포르 등의 케이스를 공부하여 한국국민과 정부에 최선이 되는 정책적 그림을 만들도록 준비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이슬람 국가와의 정치, 종교, 문화, 경제의 영역에서 가장 좋은 모델을 한국 정부가 만들 수 있어야 한다.52)왜냐하면 무분별한 다문화는 실패한다는 사례를 이미 유럽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다문화는 실패했다고 공언하였다.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2010년 10월에 “다문화 사회를 건설해 공존하자는 접근법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선언하였다. 프랑스 사르코지(Nicolas Sarkozy) 대통령은 2011년 2월 10일에 “프랑스에 있다면 (프랑스라는) 단일 국가공동체에 동화 되어야 하며, ‘프랑스식 이슬람’이 아닌 ‘프랑스 안에서의 이슬람’은 반대한다고 선포하였다.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는 2011년 2월 5일 독일 뮌헨의 국제안보회의 연설에서 “실패한 정책(다문화주의)을 접을 시간이 됐다”고 선언하였다.53)스위스 베른대의 크리스티앙 요프케(Christian Joppke) 교수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이슬람교도들 때문에 다문화주의가 후퇴했다”고 발표했다.54)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다문화 실패를 선언하자 2월 7일 영국의 신문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의 칼럼이스트 레오 미킨스트리(Leo McKinstry)는 유럽에서의 다문화 실패 원인을 4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이슬람 테러리즘 둘째, 무슬림에 의한 성폭력 셋째, 폭력적인 범죄 넷째, 마약이다.55)
한국에서 저출산과 고령화 그리고 노동인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다문화 사회를 이루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유럽의 경우를 모델로 삼아서 이질적인 문화 이슬람 문화와의 다문화를 재고해야한다. 영국의 경우 1990년에 무슬림 인구는 110만 명이였다. 그러나 오늘날 공식적으로 2010년 영국 무슬림 인구는 280만 명이 되었다. 비공식적으로는 55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20년 만에 영국 내에 이슬람 인구는 전체 인구의 5%로 증가한 것이다. 2030년에는 영국인 인구의 10%가 이슬람 인구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56)이렇게 되면 1990년부터 2030년까지 40년 동안에 이슬람 인구는 5배로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57)
영국에서의 이슬람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이민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서의 이슬람인구 증가와 다르지 않다. 이민자들에 의한 다산, 결혼, 개종에 의하여 이슬람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결국 영국은 이슬람화 된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영국 뿐 만이 아니라 유럽은 이슬람화 되어 유라비아(Eurabia, 유럽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합성어)가 되었으며, 유라비아의 수도는 런더니스탄 즉, 런던이다. 현재 런던의 인구는 3분의 1이 외국에서 태어나서 이민 온 이민인구이다. 영국에 있는 모든 무슬림의 48%가 런던에 살고 있다. 또한, 영국의 모스크의 40%가 런던에 있다.58)통계적으로 영국에는 18,000개의 모스크와 3,000-5,000개의 이슬람 센터와 꾸란 학교가 있다.59)
영국의 초창기 무슬림들은 영국에서 사회의 하층민으로 살기 시작하였다. 무슬림들은 영국인과의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고자 어느 한 지역을 중심으로 게토(Getto)를 형성하면서 살기 시작하였다. 세대가 이어지면서 그들 게토 안에서 영국인들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커져만 갔다.60)무슬림들의 인구가 많아지면서 그 지역은 이슬람화 되었다. 지역이 이슬람화(Muslims areas)되면,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은 자경단(morality police)을 만들어서 이슬람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테러를 자행한다. 한 예로, 2012년 12월 30일 영국인 모델 나오미(Naomi)는 남자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무슬림이 많이 사는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만 내놓고 전신을 가린 니캅(Niqab)을 입은 무슬림 여성이 다가와서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달아났다. 나오미의 얼굴은 염산으로 인하여 일그러졌고 눈은 실명할 뻔하였다. 그녀는 몇 차례 수술을 하였으나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61)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자경단은 그 지역에서 술을 마신다거나, 짧은 옷을 입고 다니는 여성들에게 테러를 자행하며 "이곳은 샤리아(Sharia)법으로 다스려지는 이슬람 구역입니다" 라는 글을 그 지역에 붙인다. 따라서 영국인들이 그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곳은 중동의 한 도시처럼 이슬람법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이슬람 지역(sharia-controlled zones)이 되어간다.62)
뿐만 아니라 훨씬 중요하고 실질적인 이슬람 수용 사례는 샤리아 법의 도입이다. 샤리아(Sharia)는 이슬람 율법을 의미하는데 이 샤리아를 적용하는 법정이 현재 영국 사법제도의 일부로 공식 편입되었다. 2007년 8월에 무슬림 국제법원의 샤리아 재판소를 여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이 통과된 후에 2008년에 영국 런던(London), 버밍햄(Birmingham), 브레드포드(Bradford), 맨체스터(Manchester), 누네톤(Nuneaton), 워릭(Warwickshire), 글라스고(Glasgow)와 에딘버러(Edinburgh)에 샤리아 법정이 세워져서 샤리아 법정에 증언청취와 심문의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이 법정의 판결에 법적 구속력을 허용했다. 2009년에는 영국 전역에서 85개의 샤리아 법정이 세워졌다.63)
영국 청소년 위원회(Children's Commissioner) 부대표인 수(Sue Berelowitz)의 연구에 의하면, 2010년부터 2011년까지 14개월 동안 영국에서 2,409명의 소녀들이 아시안 조직폭력배들에 의하여 성폭력을 당했다고 보고하였다.64)영국에서 아시안 조직폭력배는 무슬림 조직폭력배를 의미한다. 옥스퍼드 주의 법원은 9명의 무슬림 조직폭력배들이 79번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재판을 하였다. 그들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11살에서 15살 사이의 어린 영국소녀들 가운데 가정에 문제가 있는 소녀들에게 마약과 집단 성폭력을 행사하였으며 성매매를 강요하였다.65)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관심 대상으로 떠오른 무슬림은 세계적 테러사건의 주동자가 되었다. 그 후 911일이 지난 2004년 3월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연쇄폭발로 190명이 사망하였다. 2005년 런던에서 4명의 테러범에 의하여 50여명이 사망한 지하철, 버스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이른바 자생적 테러범들이였다. 런던 테러 이후에 4개월이 지나지 않아 프랑스 차량 약 9,000대가 불타는 소요사태가 발생했는데 대부분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주축이 되었다.66)런던 테러 1주년 무렵인 2006년 8월에 영국 무슬림 청년들의 여객기 공중폭파음모가 밝혀진 후에 유럽 각국은 테러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고 있다.
위에 언급된 사건들은 모두 무슬림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9.11테러가 일어난 직후 가족을 잃은 한 여인이 들고 있던 피켓에 쓰여진 글귀가 생각난다. “not all Muslims are terrorists, but all terrorists are Muslims"(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테러리스트는 모두 무슬림이다) 9.11테러범들에 대한 내용이지만 실제로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테러의 약80%는 무슬림들에 의하여 일어난다. 이슬람에서 일어나는 테러는 이슬람의 교리 가운데 구원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에는 구원을 받는 방법이 4가지가 있다. 첫째는 숙명론에 의한 알라의 일방적인 선택 (꾸란 9:51)67)둘째, 선행을 많이 하면 천국 가는데 도움이 된다(꾸란 23:102-103, 꾸란 101:6-9)68)셋째, 메카의 성지 순례하는 이들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꾸란 3:97)69)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3가지 구원에 관한 교리들은 모두 죽은 후에 심판대에 가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의 경우에는 영생과 천국이 보장된다. 그 교리는 이슬람을 위한 전쟁 즉, 지하드(Jihad)에 참전했다가 순교하는 경우이다. 그로 하여금 알라의 길에서 성전케하여 내세를 위하여 현세의 생명을 바치도록 하라. 알라의 길에서 성전하는 자가 살해를 당하건 승리를 거두건 알라는 그에게 크나큰 보상을 주리라(꾸란 4:74). 이슬람을 방어하거나 확장하는 지하드 전사는 반드시 천국에 간다.70)이러한 구절을 꾸란에서는 칼의 구절(Word of Sword)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꾸란에는 109구절이나 반복된다.71)따라서 이슬람에서의 지하드는 이슬람이 있는 곳에서 테러가 일어나는 끊임없는 원인이 된다.
지난 7.7런던 테러의 주범들은 모두 영국에서 태어난 무슬림들이다. 그들은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무슬림으로 영국에 정착한 2세였다. 그러나 영국사회의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취업의 장벽이 높자 이에 불만을 가지고 이슬람 전사로 변해가는 것이다. 현재 영국에서 살고 있는 무슬림들 중에 지하드 전사가 되어 시리아의 내전에 반군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영국 시민권자가 250명이나 된다.72)이들이 내전에서 돌아오면 전쟁을 경험한 테러리스트로서 성장하기에 영국 사회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곧 한국의 경우에도 무슬림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이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때 잠재적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지난 2월 9일 스위스국민당(SVP)이 제안한 ‘이민제한법안’을 국민투표를 통하여 지지50.3%로 반대49.7%를 이기고 근소한 차이로 통과시켰다.
국가 안보 차원에서 무슬림의 한국유입은 신중해야 한다. ‘소 읽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도 지금부터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다문화 사회를 교훈으로 삼아 이슬람 인구의 유입을 막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2. 교회에 대하여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개종자들 중 80%이상이 교회에 출석하던 기존 기독교인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73)영어로 그들을 Back Sliding Christian 이라고 부른다. 2013년 5월에 영국의 수도 런던의 거리에서 부대로 들어가는 영국군인이 길에서 참수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영국군인 릭비(Lee Rigby)를 죽였던 마이클 아데볼라요(Michael Adebolajo)는 2001년에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또한 마이클 아데바웨일(Michael Adebowale)도 2005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로서 나이지리아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교회를 나가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74)유럽과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동기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이슬람은 그들의 믿음을 공격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서로에 대한 우정을 가지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이웃을 향하여 이슬람을 전파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슬람 방식의 옷을 입히고 학교에 보낸다.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전하면 무슬림들은 담대하게 거절한다. 또한 이슬람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타락한 유럽문화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어린 시절부터 꾸란을 암송시킨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은 이맘(imom)을 초대하여 꾸란 과외공부를 시킨다. 타임지에 의하면 영국의 무슬림 사라(Sara Ege)는 7살 아들이 꾸란을 암기하지 않는다고 하여 때려서 살해한 일이 있었다.75)
둘째, 이슬람은 교리가 단순해서 이해하기가 쉽다. 기독교에 비하여 그 가르침이 단순하고, 의무를 감당하기 쉬운 것이다. 또한 이슬람은 기독교에 비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 교리(성육신, 그리스도의 속죄, 구속, 삼위일체, 원죄 등)처럼 어려운 내용이 없으며,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는 합리적으로 나타난다. 그 믿는 것이 복잡하지 않다. 그래서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 다음에 나타난 종교로서 3대 종교 중에 정점을 이루고 있다.
셋째,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다. 유럽의 많은 가정들이 점차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에는 한 부모 가정이 2백만 가정이나 된다.76)따라서 청소년들은 한 부모 가정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형제애를, 무슬림 공동체에서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또 서로의 문화를 확인하고 결속시킨다. 기도 시간이나 순례 기간 동안에 광범위한 영역의 사람들이 연합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표면적으로나마 보이는 것이다. 슬프게도 이런 형제애가 교회에서는 막혀있다.
넷째, 유럽은 이슬람의 지적 센터가 되었다. 많은 무슬림들이 유럽으로 유학을 온다. 그들은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한 신문과 잡지 수련회와 청소년 캠프를 열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대학교 캠퍼스에 많이 동원하는 것이다. 무슬림형제단, 자마트 이슬라미야, 타크피르 알 헤즈라(무역센타 폭파사건에 연루되어있다), 헤즈볼라(1983년 250명의 미군해군을 죽인 자살폭탄테러에 관련되어 있다)등 전문적인 학생조직에서 무슬림을 대상으로 동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77)또한, 그들은 사회적인 정의와 정치적인 정책,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슬림의 관심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78).
한국의 기독교인구는 1985년에 16%에서 1995년에 19.7%로 성장했다가 2005년 18.7%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2005년 정부가 시행한 인구주택조사 결과 개신교 인구는 870만(18.7%) 정도였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나겠지만 870만 중에 150만-250만 정도를 이단으로 본다면 개신교인의 숫자는 2005년 기준으로 620만-720만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숫자마저도 한국 사회의 인구구조 변화(저출산, 고령화)와 기독교자체의 부흥동력상실, 그리고 교회 이미지의 실추-2013년 5월에 한국기독교목회자 협의회에서 조사한 ‘2012년 한국인 종교생활과 의식조사’결과에 따르면 교회를 다니다가 나가지 않는 이유로 ‘목회자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19.6%), ‘교인들이 배타적이고 이기적이어서’(17.7%), ‘현금을 강조해서’(17.6%)등의 응답이 많았다.79)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던 사람들 이라는 언급을 했다. 이슬람은 교리적으로 성직자가 없다. 예배시간에 앞에 나와서 인도하는 이맘이나 쉬흐는 연장자가 하게 된다. 또한 이슬람에는 헌금이 없다. 이슬람의 교리 가운데 5행 중에 자카트(Zakat)가 있다 이는 자기 수입의 2.5%를 떼어서 구제금에 사용하는 것이다. 꾸란에 언급된 구제금에는 이슬람 사원에 갖다내는 항목이 없다.80)개인적으로 구제하는데 사용하면 된다. 이 또한 강제성이 없기에 자유롭다. 이슬람에서의 예배는 어디에서나 하루에 5번씩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하여 예배하기에 꼭 모스크에 가야한다는 부담이 없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는 같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똑같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담이 없는 이슬람으로 개종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혹자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으로 인하여 개신교 인구가 줄어든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한국에서 종교인구는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기독교가 쇠퇴할 때, 불교와 천주교는 성장했다. 2005년 통계를 기준으로 천주교는 186만 명(1985년 기준)에서 514만 명으로 성장했다. 불교는 1,072만 명으로 늘어났다. 심지어 이단들마저 성장했다. 무교(무속신앙)도 매년 40%씩 성장했다.”81)각 개교회가 건강해야 희망이 있다.
또한 주일학교에 전념하여야 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주일학교 규모는 장년교인의 2-3배였다. 그런데 지금은 장년교인의 30%밖에 안된다. 그마저도 10년마다 30%씩 줄고 있다. 이대로 30-40년이 지나면 한국교회 전체 주일학교 규모는 30-40만 명으로 줄어든다”82)교회관련 연구소에서 장년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처음 교회에 나간 때가 주일학교라고 대답한 교인이 80%였다. 참고로 영국의 기독교 상황은 어떤가? 영국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5,000여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지금도 매주 4개씩 문을 닫고 있다. 지난 2000년 4월 16일 영국일간지 더 인디팬던트(The Independent)에는 “영국 교회 40년 이내에 사라진다”(The Church will be dead in 40 years) 라는 기사가 실렸고, 영국성공회의 케리(George Carey) 주교는 2001년 9월 7일 ”영국은 이제 선교지가 되었다.“ 고 했다. 영국전역에 개신교회에 출석하는 인구를 200만 명으로 보는 통계도 있다. 카톨릭과 성공회를 모두 포함한 통계도 전체인구의 7.5%인 430만 명에 불과하다. 1980년에서 2005년 사이에 140만 명이 교회출석을 중단하였다. 이렇게 교인 30%가 감소했다는 것은 매주 1,100명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25년 간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42%, 웨일즈의 53%나 교인출석이 감소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교회는 무너져가는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여, 1990년부터 10년 동안 전도특별기간으로 선포하고 전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에도 75만 명의 교인이 줄었다. 현재 영국교회의 53%는 주일학교를 운영하지 못하고, 86%의 교회에 중고등부가 없다.83)교회가 내리막길을 걷는 동안 이슬람이 성장하고 있다.
이는 비단 유럽교회의 문제가 아니다. 중동은 과거 비쟌틴 기독교제국이었으나, 지금은 이슬람지역으로 바뀌었다. 유럽도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그 길을 따라가게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기독교가 망하는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망하지 않는다. 전 세계 복음주의적 기독교는 이슬람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하지 않는 교회,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는 사라진다. 또한 한국교회는 한국으로 이주하는 무슬림에 대한 적절한 선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0만 명이 넘는 무슬림공동체는 한국 안에서 미전도종족(unreach people)으로 소리없이 성장하고 있다.
나가는 말
기독교인으로서 이슬람에 대하여 처음 연구하였던 사람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서 살았던 요한네스(Johannes)였다. 그는 무함마드(Muhammad, 570-632)가 죽은 지 약 20년 후에 태어났다. 만수르(Mansour)의 명문가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이슬람군주 무아위야 1세(Muawiyah 1, 602-680)아래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무아위야 1세의 뒤를 이은 왕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자, 요한네스는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사바(Mar Saba)수도원에 은신하였다.84)그는 자신의 신학적 저술인 『지식의 근원』“제 2부 이단에 관하여” 에서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단이었던 아리우스파 수도사로부터 정보를 받아서 이슬람이 시작되었으며, 꾸란에서 예수님은 비록 알라의 말씀이며, 영으로 언급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단이다”85)라고 했다. 이슬람에 대한 연구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대제(Suleyman the Magnificent)는 과거 비잔틴 제국의 영역을 모두 정복한 후에 유럽을 공략하였다. 1521년 베오그라드를 함락했고, 1523년 로도스 섬을 함락했으며, 1526년 헝가리를 함락시켰다. 1529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이 포위를 당했다. 따라서 이러한 이슬람으로 인한 위기의식 가운데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을 연구하였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였던 칼뱅(J. Calvin)은 1550년에 집필한 데살로니가후서 주석에서 “변절이 보다 널리 퍼졌도다! 무함마드가 변절자였음으로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추종자들과 터키인들에게로 돌아섰다. ...무함마드 분파는 격렬한 홍수와 같은데 그 폭력성으로 교회의 절반을 떼어갔다”86)고 주장했다. 그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 2절을 주해하면서 “무함마드가 배교자가 되어 그의 추종자들인 터키족을 그리스도에게서 따돌리게 되자 이 배신이 더 넓게 확대되었다.”87)고 하였다. 칼뱅은 그의 저서에서 무함마드는 거짓 선교자이고, 이슬람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또 요한일서 4장 2절과 3절을 근거로88)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이슬람은 기독교이단이라고 주장하였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오스만 터키인의 위협 즉, 이슬람의 위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사람들에게 촉구하였다. 그가 1526-29년 어간에 쓴 그의 글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채찍과 진노라고 하며 무기로 대항하여 싸우기보다 고통을 감수하며 회개와 눈물과 기도로 싸우라고 권하였다. “터키인들과는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가르치는 육체적인 방식으로 싸워서는 안되고...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감수해야 하거나 회개와 눈물고 기도로 싸우고 내몰아야할 하나님의 채찍과 진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89)또한 십자군의 이름으로,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90)루터가 무함마드와 꾸란을 비난하는 논점은 첫째, 악마가 무함마드를 교사하고 있기 때문에 꾸란은 악마의 작품이라는 것 둘째, 이슬람의 확장은 전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루터는 기독교의 반이슬람 논쟁자들의 반열에 서있다. 그에 의하면 이슬람은 사탄의 세력으로서 기독교 신앙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재정하신 모든 세속적인 질서도 파괴 한다고 주장했다.91)
필자는 1990년부터 GMS파송 선교사로 이집트 빈민가에서 사역하면서, 알 아자르 대학교(이슬람 최고 명문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이맘(이슬람 종교지도자)에게 2년간 하루 두 시간씩 매일 꾸란을 배웠다. 그로 인하여 아랍어가 향상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슬람과 기독교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들을 알 수 있었다. 이슬람을 공부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슬람은 기독교와 비슷한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꾸란의 모든 단어의 18%가 아랍어 성경의 어형을 지니고 있으며, 그 중 75%는 신약성경에서 이용한 것이다.92)
이집트에서 6년간 사역을 한 뒤에는 영국에서 선교단체를 시작하였다. 영국에서 사역하는 16년 동안, 영국에서 일어나는 이슬람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난 8개월 동안 한국의 이슬람이 성장하는 것을 연구하면서 큰 위기감을 느낀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으로 대체된 것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기독교가 종교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고, 골고다 산상의 십자가를 자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때, 이슬람이 몰려왔고 그에 대항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채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는 그 주권을 이슬람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한국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원시적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므로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요한계시록 2장 5절을 기억해야 한다.
이슬람으로 인하여 꾸란을 연구하고, 종교개혁을 가속화 시켰던 마르틴 루터의 말로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슬람에 대하여 대항하여 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더 개선하자는 것이다.”93)
1) 총신대학교(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equiv.)을 졸업했고, 영국 웨일스대학교 신학/이슬람학부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과정을 수학했다. GMS 파송선교사로 오엠선교회와 협력해 이집트에서 사역했으며, 현재 FIM국제선교회 대표,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사로 있다. 저서로는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생명의말씀사) 등 다수가 있다.
2) Worldometers, Current World Population, http://www.worldometers.info/world-population/ (accessed 17 March, 2015).
3) 김정위, 중동사 (서울: 대한교과서, 2008), p. 452.
4) Akhbaru'd Sin wa'l Hind-中國과 印度消息, Sulaiman˜n ad-Ta˜jir, (Paris, 1948), p. 108; 김정위, p. 454.
5) Ibn Khurdadbid, K. al-masalik, p. 70.; 김정위, p. 452.
6) Abu Abdu'l lah Mohammad Ibn Abdu'l lah al-Idrisi, Nuzhatu'l Mushtaq fi Ikhtiraqi'l Afaq, (Napoli, 1970), p. 116; 무함마드 깐수, 新羅ㆍ西域交流社 (서울: 건국대학교, 1992), p. 193.
7) 정수일, 이슬람문명 (서울: 창작과 비평사, 2002), pp. 330-1.
8) 무함마드 깐수, pp. 270-1.
9) 오늘날의 울산을 의미하며 신라 시대에는 최대 국제 무역항이었다.
10) 왕의 측근에서 천체이변으로써 길흉을 가리는 일을 맡은 관직을 의미한다.
11)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서울: 학고재, 2004), p. 163.
12) Ibid, p. 173.
13) 고병익, 東아시아의 傳統과 近代化 (삼지원, 1984), p. 80.
14) 이희수, 이슬람 (서울: 청아, 2008), p. 424.
15) 당나라와 송나라에 걸쳐 중국에서 아라비아를 지칭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이다. 대식은 7세기 중엽 이후 송대까지 주국에서 아랍, 페르시아인 및 무슬림들을 지칭하였고, ‘대식 상인’들은 아랍 무슬림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16) 高麗史, 제 5권, 세가 제5, 현종2, 현종 갑자 15년 (1024년).
17) 이희수, 한ㆍ이슬람 교류사 (서울: 문덕사, 1991), p. 81.
18) 高麗社, 123권, 열전 제36, 폐행 1, 장순룡.
19) 이희수, p. 134.
20) Ibid, p. 129.
21) 高麗社, 제32권, 세가 제32, 충렬왕 5, 충렬왕 신축 27년(1301년)., 高麗社, 제32권, 세가 제 32, 충렬왕 5, 충렬왕 계묘 29년(1303년)., 高麗社, 제32권, 세가 제32, 충렬왕 5, 충렬왕 을사 31년(1305년).
22) 朝鮮王朝實錄, 영인본 1책, p. 383.
23) Ibid., 2책, p. 270.
24) Ibid., 3책, p. 54.
25) 정수일, 『이슬람문명』, p. 346.
26) 이희수, p. 346.
27) Ibid., p. 251.
28)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Islam in Korea, (서울: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2008), p. 3.
29) 이희수, pp. 257-8.
30) Ibid., p. 262.
31)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p. 5.
33) 최윤식, 2020 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서울: 생명의말씀사, 2013), p. 146.
34) Ibid., p. 151.
35) 박성호, “다문화와 노인문제”, http://ilyo.co.kr/detail.php?number=70788 (accessed 17 February 2014)
36) * 계산법 : (체류인원) x {(무슬림비율) / 100} [소수점 이하는 ‘버림’으로 하였다.]
ex) 아제르바이잔 : 142 x 0.934 =132.63 [반올림을 하면 133명이지만, 버림으로 하여 132명으로 산출]
* 무슬림비율은 다음의 Website를 참고하였음(2014. 1. 22(수). am 10:05 접속)
http://www.nationmaster.com/graph/rel_isl_per_mus-religion-islam-percentage-muslim
(단, 팔레스타인 지역은 대한민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소개를 참고하였음)
38) Willam Wagner, How Islam Plans to Change the World, 한국어 역, 이슬람의 세계 변화 전략, 노승현 역 (서울: APOSTOLOS PRESS, 2007), p. 137.
39) 김아영, "한국의 이슬람, 우리 안의 미전도 종족", 『목회와 신학』 2013. 11월호, p. 42.
40) 한국기독교범교단이슬람대책위원회, 이슬람을 경계하라, (서울: 한국기독교범교단이슬람대책위원회, 2012), p. 20.
41) 김아영, p. 42.
42) Steve Doughty, "Number of British Muslims will double to 5.5m in 20 years", Daily Mail, 28 January 2011.
43) J. Dudley Woodberry, From Seed To Fruit (Pasadena: William Carey Llbrary, 2008), Introduction.
44) “2013년 한국출산율 1.18명... 전년보다도 떨어져”, 『연합뉴스』, 2014. 2. 13.
45) 조희선, “한국 무슬림 정체성”, Muslim-Christian Encounter, Vol. 4(한국이슬람연구소, 2010), p. 98, p. 111.
46) 이정순, “기독교 선교적 관점에서 본 국내 모슬렘 여성”, 『목회와 신학』, 2013. 11, p. 67.
47)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문화: 걸프 해에서 경주까지 1200년 교류사( 청아출판사,2012), p. 350.
48) Ibid.
49) 이희수, "한국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미간행. 한국이슬람연구소 공개강좌 강의안, 2004, 4.
50) 2007년 8월 한국이슬람중앙회 발행, ISLAM in KOREA.
51) “한국 무슬림 인구 20만 명 넘어서”, 『선교타임즈』, 2012. 8, p. 21.
52) 정마태, “이슬람을 향한 기독교 선교의 역사적 흐름과 한국적 대안(1900-2012)” 『이슬람 연구1』,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13), p. 332.
53) 『한국일보』, 2011년 2월 23일.
54) 『연합뉴스』, 2011년 11월 30일.
55) Leo McKinstry, "The Pm's Right Speak Out Against Multiculturalism", Daily Express, 7 February 2011.
56) Steve Doughty, "Number of British Muslims will double to 5.5m in 20 years", Daily Mail, 28 January 2011.
57) Ibid.
58) “Islam in Britain", Institute for the Study of Islam and Christianty Bulletin (London: The Institute), October/November, 1996.
59) ‘Britain, Bengali but British’, Go, Interserve, 2nd Quarter 1996, 8. 참고로 2005년 통계에 의하면 스웨덴에는 250개의 모스크가 있고, 덴마크에는 150개, 프랑스에는 약 1,500개의 모스크가 존재한다. 독일은 2,600개의 모스크가 있다.
60) 공일주, "한국의 교회와 무슬림 사역의 방향", 『이슬람선교포럼』, 한국선교신학회, 2009년 4월 18일, p. 45.
61) Tom Morgan and Anthony France, "Woman in niqab wrecked my life in acid assault", Sun, 2 February 2013.
62) Henry Bodkin, "Sharia patrols snatch drinks from passers-by", The Sunday Times, 13 January 2013.
63) Douglas Murras, "The 2009 Charles Douglas-Home Memorial Trust Award essay", The Times, 30 December 2009.
64) Andrew Norfolk, "Role of Asian gangs is played down by report on thousands of child sex victims", The Times, 21 November 2012.
65) Alexandra Topping, "Jury told of 'living hell' of rape and trafficking by child sex ring" The Guardian, 16 January 2013.
66) 위 사건들에 관하여는 위키피디아(Wikipedia)를 참조하였다.
67) “일러 가로되 알라께서 명령한 것 외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있을 수 없나니 그 분은 우리의 보호자이사 믿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분이시라” (꾸란 9:51).
68) “그때 그의 선행이 많았던 자들은 번성할 것이며 그의 저울이 가벼운 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잃고 지옥에서 영생하며” (꾸란 23:102-103), “그날 그의 선행이 무거운 자는 안락한 삶을 영위할 것이나 그의 선행이 가벼운 자는 불지옥의 함정에 있게 되리라” (꾸란 101:6-9).
69) “그곳에는 예증으로서 아브라함의 발자국이 있나니 그곳에 들어간 자는 누구든 안전할 것이며” (꾸란 3:97).
70) “알라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들은 알라의 양식을 먹으며 알라의 곁에 살아있노라” (꾸란 3:169).
71) Don Richardson, Secrets of the Koran, 2003, 한국어역, 이희민, 『코란의 비밀』, (서울: 쿰란출판사, 2008), p. 288.
72) "Britain facing a 'bic problem' from jihadists returning from Syria", The Times, 16 February 2014.
73) Medowell, Bruce A. and Anee Zaka, Muslims and Christians at The Table (Phillipsburg, New Jersey P&R Publishing, 1999), p. 6.
74) Roland Watson, Jenny Booth and Sean O'Neill, "Woolwich 'killers' were known to security services", The Times, 23 May 2013.
75) Simon de Bruxelles, "Woman beat son, 7, to death and burnt body after he could not memorise Koran", The Times, 6 December 2012.
76) Steve Doughty, "Britain's two million single parent families", Daily Mail, 20 January 2012.
77) Jan Goodwin, Price of Honor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1994), pp. 12-3.
78) George W. Braswell, Understanding Sectarian Groups in America (B&H Publishing Group, 1994), p. 282.
79) 『서울신문』, 2013년 9월 13일
80) “실로 싸디까는 가난한자, 불쌍한자, 거기에 종사하는자, 그들의 마음이 위안을 받을자, 노예, 채무인자, 알라의 길에 있는자, 그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니 이는 알라로 부터의 명령이라 알라는 아심과 지혜로 충만 하시도다.” (꾸란 9:60)
81) 최윤식, p. 79.
82) Ibid.
83) 최종상, "영국교회의 현황과 한인교회의 영국선교 방안“, 『디아스포라영국』, 재영한인연합회 (서울: 에디아, 2004), pp. 64-78.
84) 비교, Joachim Gnilka, Bibel und Coran: Was verbindet, was sie trennt, 3. Aufl. Freiburg, 2004. 한국어 역판 ‘성경과 꾸란 무엇이 같으며 무엇이 다른가?’, 오희천 역, (서울: 중심, 2005), p. 37.
85) Ludwig Hagemann, Christentum contra Islam, Darumstadt, 1999. 한국어역,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 실패한 관계의 역사, 채수일, 채혜림 역 (서울: 심산, 2005), pp. 152-74.
86) J. Calvin, Comm. on 2 Thess. 2:3, CO 52, p. 197; 김성봉, “이슬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목회와 신학』, 2013. 11호, p. 53. 재인용.
87) J. Calvin’s Commentary on Second Thessalonians in his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and to the Thessalonians, Grand Rapids: Eerdmans, 1961 rep., pp. 398-400; 김성봉, "이슬람에 대한 칼뱅의 견해“, 미간행. FIM국제선교회 ‘크리스찬을 위한 이슬람세미나’ 공개강좌 강의안, 2013, 10. 재인용.
88)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89) F. N. Lee, Luther on Islam and Papacy, 2000; 김성봉, “이슬람에 대한 루터의 염려”, 미간행. FIM국제선교회 ‘크리스찬을 위한 이슬람세미나’ 공개강좌 강의안, 2012, 10. 재인용.
90) Ludwig Hagemann, p. 156.
91) Ibid., pp. 152-65.
92) Abd al-Masih, Dialogue with Muslim, 한국어 역, 무슬림과의 대화, 이동주 역 (서울: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2009), p. 171
93) Ludwig Hagemann, p.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