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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중의 기쁨' 주는 취미는 어떻게 종교가 되는가

  • hansewan
  • 조회 : 2401
  • 2016.10.21 오후 03:13

‘적중의 기쁨’ 주는 취미는, 어떻게 종교가 되는가
[311호 커버스토리] 유도·우슈 즐긴 철학자, 강영안 서강대 명예교수
[311호] 2016년 09월 26일 (월) 15:30:17옥명호 편집장 goscon@goscon.co.kr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취미는 무엇일까? 산책, 난초 기르기, 정원 가꾸기 같은 자연친화적이면서 관조적인 활동일까? 아니면 서예, 수묵화, 클래식음악 감상 같은 명상적이고도 정적인 활동일까? 이 물음이 편견일 수 있음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 철학자인 강영안 서강대 명예교수(현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를 만나 보면 알 수 있다.

  
▲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 인터뷰는 흡사 ‘철학자의 취미론 특강’을 듣는 듯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칸트를 전공한 철학자로서 한국칸트학회와 한국철학회 회장뿐 아니라 기윤실 공동대표로도 섬긴 바 있는 강 교수는, 유도와 우슈를 취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공인유단자(각 2단)이기도 하다. 무예를 취미로 삼은 기독 철학자의 취미 이야기가 몹시 궁금하던 차에, 강 교수에게 인터뷰를 청하여 지난 9월 2일 서울역사 내 카페에서 만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 인터뷰는 흡사 ‘철학자의 취미론 특강’을 듣는 듯했다.

― 언젠가 교수님을 뵌 자리에서 개인 취미생활을 이야기하신 게 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서 인터뷰를 요청드렸다.
난 무슨 얘길 했는지 기억이 없다.(웃음) 내 취미생활을 얘기하기 전에, ‘취미’라는 말 자체는 서양에서 들어온 ‘근대어’다. 취미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도 근대적 현상이다. 영어의 ‘hobby’라는 말도 근대 이전에는 없었다. 그러니 ‘취미’라는 우리말도, 한국 땅에는 20세기에야 등장한 말이다. 이는 왜 취미라는 것이 근대적 삶의 양식과 함께 들어오게 되었는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 어떤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것인가.
복잡한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무슨 시간이냐 하면, ‘일(노동)할 시간’이다. 물론 근대 이전 농사짓고 살 때부터 일하는 시간은 있어왔다. 그러나 근대의 한 현상으로서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일정한 시간에 출근해서 일정한 시간에 퇴근하는 ‘일할 시간’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월화수목금토일의 7일, 한 주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생활하는 것 역시 근대식 생활 방식이다. 예전에는 초순, 중순, 하순 등 열흘 단위로 날짜를 잘라서 생각했다면, 근대에 들어서 7일 단위로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7일 단위에서도 엿새 동안 일하고 나서 하루는 ‘쉬는 날’로 보내게 된다. 이렇게 ‘쉬는 날’이 생겼고, 그리고 하루 중에도 ‘쉬는 시간’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쉬는 시간도 예전부터 있었겠지만, 근대화 이후 그런 시간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학교 다니는 사람에게는 ‘방학’이라는 것이 생기듯 시간이 주어지면서 여유 시간이 생겼고, 취미라고 하는 고유한 활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낚시, 그림 그리기, 각종 놀이 등은 예전부터 하던 활동이지만, 그런 것을 ‘취미’라고 부른 건 근대에 와서 시작된 일이다. 

― 더 구체적으로 풀어달라.
가령 등산을 생각해보자. 옛날 사람들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소를 먹이러 산에 갔다. 요즘처럼 운동하기 위해서, 혹은 산에 오르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산에 가는 건 근대 들어서 생긴 일이다. 서양 역사에서 등산가의 수호성인으로 생각하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라는 사람이 쓴 〈방뚜 산 등정기〉란 글이 있다. 그가 1336년 4월 26일에 프랑스 남부에 있는 방뚜 산(Mont Ventoux)을 등정하고 쓴 글로, 자신이 산에 올랐던 이야기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썼다. 페트라르카는 나무를 하러 가거나 소를 먹이러 산을 오른 게 아니었다. 전투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저 산을 오르기 위해서 등산을 최초로 시작했던 것이다. 
책을 보면, 페트라르카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감탄을 한다. 너무나 웅장한 대자연에 감탄하다가, 배낭에 넣어온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펼쳐 읽는다. 그때 그는 ‘사람들이 산과 들로 나가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놀라지만 막상 놀라야 할 대상인 자기 자신은 잊어버렸다’는 구절을 읽고 충격을 받는다. 이것이 르네상스 인문학의 시작이 되었다고들 한다. 자기 자신 안으로, 자기 내면으로의 복귀가 진정한 인문학이라고 할 때, 자기 자신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상기시키고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르네상스 인문학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 "‘취미’라는 우리말도, 한국 땅에는 20세기에야 등장한 말이다. 이는 왜 취미라는 것이 근대적 삶의 양식과 함께 들어오게 되었는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시간이 주어지면서 여유 시간이 생겼고, 취미라고 하는 고유한 활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낚시, 그림 그리기, 각종 놀이 등은 예전부터 하던 활동이지만, 그런 것을 ‘취미’라고 부른 건 근대에 와서 시작된 일이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취미가 근대적 삶의 양식과 함께 시작된 근대적 현상’이라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연관이 있다는 얘긴가?
그렇다. 취미가 근대 사회에 주어진 긴 이야기를 줄여서 하면 이렇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시간이 확보되었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공간도 확보되었지만, 중요한 건 시간이 확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의 확보와 취미가 어떻게 연결이 될까? 지루하고 지겨운 시간 때문이다. 몇 가지 단계로 설명이 되는데, 먼저 ‘일’이 있어야 한다.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중심 활동이 있어야 한다. 있는 게 시간뿐인 사람에게 등산이 취미라고 할 수 있을까? 취미라고 규정할 수 있는 행위가 가능해지려면,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중심 활동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것과 ‘구분되는’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취미와 일을 구분하는 방법으로는, 삶에서 주된 활동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취미는 삶에서 주된 활동이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나처럼 평생을 학자로 살아온 사람에겐 독서가 취미여서는 안 된다. 공부하는 것이 일인 사람에게 독서는 취미일 수 없다. 학자의 주된 일은 공부이고 책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과 취미가 하나가 되는 게 가장 좋다. 일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일이 되는 게 가장 좋은 상태일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그렇게 구분되지 않나. 일에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거기서 금전적인 소득을 얻는다. 취미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는 없다. 취미에서 소득이 발생하기도 어렵다. 단순 대비하여 무겁고 힘들고 벗어나고픈 활동이 일이라면, 취미는 가볍고 계속 하고 싶고 재미있는 일이다. 이런 취미를 누리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등산이든 걷기든,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골프나 스키, 요트처럼 상당한 돈이 필요한 취미도 있다. 물론 오랜 연습을 통한 기술 습득도 요구된다. 이렇게 보면, 취미를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한다. 

― 취미가 근대의 발견이라면 근대 이전 사람들은 취미가 없었다고 봐야 하는가?
과거의 옛 사람들에게 취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주전 12세기를 살았던 중국 주나라의 강태공이 낚시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낚시를 취미라 할 수 있을까? 그건 취미라기보다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소일’(消日, killing time)이 아닌가 한다. 취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소일하는 것을 취미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다. 취미의 다른 면을 생각해보자면, 파스칼이 지적한 얘기가 있다. 앞서 취미와 시간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는데, 특별히 ‘지겨움’과 연관이 깊다. 만약 우리 인생살이에서 지겨움이 없다면, 지루함이 없다면, 내가 하는 일이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면, 다시 말해 그 시간이 ‘꽉 찬 시간’ 곧 의미 있는 시간으로만 채워진다면, 굳이 취미라는 걸 찾지는 않을 것이다. 취미를 찾는 것은 지겨움에서 벗어나거나 지겨움을 잊고자 하는 노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파스칼은 그것을 ‘디베르띠스망’(divertissement)이라고 했는데, 나는 ‘시간 죽이기’라고 표현한다. 지겨운 일상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일종의 노력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골프를 치거나 우표를 수집하는 행위 등은 나를 잊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취미가 우리에게 여유를 주고 휴식이 되고 그로 인해 새롭게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산되는 이유는, 나를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기축구를 생각해보자. ‘내’가 골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그 활동(축구) 자체에 집중할 때, 그 자체가 만족과 즐거움을 준다. ‘자기 망각’을 통한 행복인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양면이 있다. 취미에 몰두함으로 휴식을 얻고 삶의 무거움과 존재의 가벼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동시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정작 성찰하지 못하도록 도피하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비참함, 즉 하나님 없이 사는 삶 자체가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른 짓’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 "하나님과 신비적 합일을 체험할 때, 스포츠를 할 때, 성관계를 할 때, 모두 각기 다른 경험이지만 근원적으로는 모두 진리에 대한 추구에 닿아 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자기 망각을 통한 만족’을 주는 취미가 종교적 영성과도 연결될 수 있나?
오늘날 스포츠는 하나의 대용 종교로 기능한다. 일본과 한국의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떠올려 보자. 축구 한일전은 사실상 ‘대리 전쟁’의 경험이다. 응원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선수들까지 모두가 집단의식으로 집결되는 경험을 한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이기는 것이다. 이기는 과정에 사람들이 왜 저렇게 몰두하고 재미있어 할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적중’의 경험 때문이다. 골문 안으로 골을 정확히 넣는 것, 그 적중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왜 그 적중이 기쁨을 주는가? 나는 그것이 인간의 두 가지 욕구 때문이라고 보는데, 곧 ‘진리에 대한 욕구’와 ‘행위의 실천에 대한 욕구’이다. 
여기서 진리에 대한 욕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이것은 공책이다” 할 때, 이 말이 참이 되려면 내가 가리킨 사물이 공책이라는 사실과 내가 한 말이 들어맞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적중’이다. 참이라는 것은 ‘들어맞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때, 딱 들어맞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과학자들이 과학 이론을 만들어 내거나, 공학자들이 자신이 고안한 로봇, 컴퓨터 등 원하는 것을 딱 들어맞게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일을 통해서도 적중과 들어맞음을 경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스포츠나 취미를 통해서는 비교적 쉽게 적중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안으로 딱 들어맞는,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그 희열은 성적 쾌감과도 유사하다(성관계도 적중의 경험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저마다 적중에 대한, 들어맞음과 하나됨에 대한 추구를 하는데, 밑바닥으로 들어가 보면 이는 진리에 대한 추구와 맞닿는다. 하나님과 신비적 합일을 체험할 때, 스포츠를 할 때, 성관계를 할 때, 모두 각기 다른 경험이지만 근원적으로는 모두 진리에 대한 추구에 닿아 있다. 
행위 실천에 대한 욕구는 이렇다. 우리가 죽기 직전까지 얻고자 하는 것은 많지만 그걸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일상의 일이 아니라, 취미로 하는 것들 가운데는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골프 칠 때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홀인원’ 같은 성취의 기쁨이 다른 삶이나 일의 영역에서는 없지 않나. 진리에 대한 욕구가 이론적 관심이라면, 성취에 대한 욕구는 실천적 관심이다. 예를 들어, 취미로 하는 수집이라 해도 단순한 수집을 넘어선 탐구 과정이 있다. 그뿐 아니라 발견하고, 소유하고, 분류하고, 저장하는 과정을 거쳐 남들에게 보여줌(전시)으로써 얻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 취미가 일종의 종교적 경험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진리에 대한 욕구나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실현 욕구의 밑바닥에는 궁극적인 것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욕구가 깔려 있다. 궁극적인 것에 대한 실현 욕구가 그 속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취미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하면, 취미를 통해 다른 신을 섬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도 여행을 하면서 예쁜 초나 종을 종종 사기도 했는데 그런 취미가 어느 정도는 괜찮다. 그런데 완전히 빠져들면, 전적으로 소유하여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하는 데 몰두하여 나는 없고 그 소유(물)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종교적 경지다. 자기가 하는 일과 구별해서 하는 취미는 어느 정도 절제와 자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종교가 되고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에 <현대문학> <사상계> <기독교사상> 등의 잡지를 수집했다. 빠진 호가 있으면 헌책방에 가서 사와서 끼워 넣었다. 전체를 갖추고자 하는 일종의 소유욕이었는데, 물론 이 잡지들이 성장 과정에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10대 시절 지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함석헌, 안병무, 장준하 같은 분들이나 백철, 조연현 같은 1세대 평론가들도 이때 알게 되었고. 그런데 이런 수집이 과하면 종교가 되는 것이다. 취미활동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노동)과는 다른 집중력을 발휘하게 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운동하면서 사회관계를 배우기도 하고, 룰을 지키면서 공정함을 배우고, 양보·인내·결단력 등 성품 형성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몰두하면 우상이 되는 것이다.

― 고등학생 시절에 <사상계>나 <기독교사상> 같은 잡지를 취미 삼아 읽었다니 놀랍다.
집에 삼촌하고 큰형님이 보던 잡지가 몇 권 있었는데 그게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생 때 취미 중 하나가 헌책방 가는 거였다. 잡지는 좀 싸서 비교적 쉽게 사볼 수 있었다. 불트만이나 본회퍼, 틸리히의 책들도 많이 샀고, 독일어 원서들도 사서 읽었다. 그걸 취미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 학교 공부와는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데, 그게 내가 학생으로서 일상적으로 하는 일과는 다른 활동이었기에 내겐 취미였다. 예를 들어, 글 쓰는 게 직업인 사람이 화단 가꾸는 일을 하면 그게 취미지만, 화원에서 아침저녁으로 꽃을 가꾸는 일을 사람에게는 일이다. 이와 달리, 화원을 가꾸는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쓴다면 그의 취미는 글(편지)쓰기가 된다. 
내 경험으로 얘기하자면, 칸트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칸트를 한참 읽다가 가끔 가다머(Hans-Georg Gadamer)를 읽거나 카를 포퍼(Karl Raimund Popper)를 읽곤 했는데, 이는 논문과 무관하게 재미로 읽은 것이다. 이때 가다머나 포퍼를 읽는 건 취미인가 아닌가? 넓게 보면 내 전공(철학)에 속하지만, 좁게 보면 박사학위 논문과는 상관없으니까 취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로 공부하던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 건물 13층이 철학과였고 14층이 신학과여서 거기 신학부 도서관이 있었는데, 금요일마다 올라가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읽었다. 그것이 내겐 휴식이자 취미였는데, 당시 《교회교의학》을 읽는 건 피로를 씻어주는 일이었다.(웃음) 내가 과거 복상 인터뷰에서 화장실 가서 바르트를 읽었다고 했더니 신학자들이 황당해했다는 얘기가 있었다던데 그건 내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바르트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바르트를 주제로 논문을 쓰거나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읽었다면 그건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취미와 일의 경계가 모호한 점이 있다. 가장 좋은 일은, 취미처럼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지금도 나는 논문을 쓴다. 그런데 교수직에서는 은퇴를 했으니까 ‘평가 대상’에서는 제외되어 있다. 요즘 내가 책을 읽고 논문을 쓰는 이유는 교수직이 요구하는 업적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직업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다. 취미와 일의 차이가 ‘열심히’ 하느냐 아니냐에 있지는 않다. 집중도에서 보면 취미나 일이나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취미에 집중도가 더 높아지곤 한다. 일을 취미나 놀이처럼 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큰 즐거움이 있을까? 일은 그 자체보다는 결과(소득/보상)로 인해 하게 되지만, 놀이는 과정에서 오는 재미를 추구한다. 동네축구선수와 프로축구선수 중에 누가 축구하는 게 더 즐겁겠나. 결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 동네축구선수가 더 즐겁게 하지 않을까? 프로축구선수는 승패가 연봉과 연관되어 있으니까 마냥 즐겁게 하기는 어렵다. 동네축구선수가 축구 그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듯, 프로축구선수이면서 동네축구하듯 즐겁게 할 수 있으면 최고로 행복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도 그럴 것이다.

― 은퇴 후에도 논문을 쓰신다고 했는데, 자유로운 여건에서 연구하고 논문을 쓰시면 더 즐겁고 행복하실 것 같다. 
사실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아서 은퇴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월급 대신 연금을 받는 연금수급자가 된 것이 은퇴 이전과 이후의 차이일 뿐이다. 게다가 이 일(이사장직)이 ‘정치 구덩이’여서 쉽지 않더라. 교수 일에서는 은퇴했지만, 공부는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평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서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자유롭게 취미로 즐겁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이제 (교수직 은퇴를 하셨으니) 학문을 끝내서 좋으시겠다. 축하드린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다. “교수 생활은 끝을 냈지만, 내 학문은 여전히 계속 된다”라고. 나는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다 보니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 공부는 죽을 때까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교수가 목표였던 사람은 교수가 되면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다. 그러나 제대로 교수를 하려면 먼저 공부가 좋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설령 교수가 안 되더라도 (힘은 들겠지만) 여전히 공부를 해야 행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공부 말고 다른 것 할 게 없는 사람만 교수를 하라고 권한다. 

― 고신대 이사장으로 일하시는 현재 취미생활은 어떻게 하고 계시나?
요즘은 논문 집필과 걷기가 내게 쉼이 되어준다. 논문 집필은 앞서 이미 이야기했는데, 걷기는 하루에 한 시간씩 한다. 예전에는 유도와 우슈를 했는데, 유도와 우슈가 각각 공인 2단이다. 요즘에는 도장에 나갈 시간이 없으니까 주로 걷는다. 솔직히 지금도 도장에 가서 온몸을 던져서 구르고 싶다. 낙법을 치고 싶다. 논문이나 걷기 외에는 지금 출석하는 교회에서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전4권) 강의를 하고 있는데, 이게 내겐 취미 생활이 되고 있다. 다음 주까지 강의하면 800쪽짜리 제1권을 여덟 번 강의로 마치는데, 이 강의를 통해 이사장 업무와 관계된 일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바빙크 신학 자체에 몰입하면서 휴식이 되고 안식이 되었다. 지난 5월부터 해왔는데 나는 무슨 일이든 집중하는 스타일이라서 이 강의를 하지 않았으면 아마 이사장 일에만 몰두하느라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 은퇴하신 교수직으로 다시 복귀하신다. 내년부터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의 철학신학 담당 교수로 가시게 된다고 들었다.
내년에 칼빈신학대학원으로 가면 다시 봉급을 받겠지만, 국내 교수 생활과는 다를 것이다. ‘철학신학’에 집중할 수 있다는 그 매력 때문에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나에게 신학은 취미였는데, 이제는 업으로 접근하게 된 것이다. 내가 기존 신학 교수들보다 유리한 점은, 그동안 신학이 나에게 업이 아니라 취미였기 때문에 설교학, 교의학, 실천신학 등 신학의 여러 분야를 폭넓게 두루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몇 년 동안 칼빈신학대학원에 있게 되면 지금까지 취미로 하던 것을 일로 삼게 될 것이다. 

  
▲ "내가 삶의 주인이냐 하나님이 주인이냐, 누구를 주인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그게 일이든 취미든 권태를 덮어버릴 수 있다." ⓒ복음과상황

― 끝으로 취미에 대해 덧붙이거나 마무리해주실 이야기가 있는지….
유도, 우슈, 독서, 걷기, 대화… 이런 취미 활동에는 그 밑에 깔린 근본적인 무엇이 있다. 유도나 우슈를 할 때, 걷거나 몸을 움직일 때 순간순간의 경험이 나에게 공통적으로 주는 느낌은, 내가 스스로 만들고 쌓아온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땀을 흘리며 하는 운동이나 글을 읽는 것이나 대화하는 것 모두 나에게는 ‘선물’이다. 일이든 놀이든 취미든, 결국 모든 것이 우리 삶에 속한 일인데, 이 삶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something given to us), 곧 ‘선물’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하게 된다. 선물로 받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반응은 ‘감사’다. 내가 받을 만하지 않은데도 주어진 것들, 가족, 친구, 가까운 이웃들도 모두 다 선물이다. 낚시를 하는 사람이 낚싯대를 잡고 있는 순간, 골프 하는 사람이 골프채를 휘두르는 순간순간이 모두 은혜로 ‘주어진’ 것들이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감사다. 감사를 통해서만 화답할 수 있다.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결국 내가 지금 여기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와 동기가 감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상 일이나 취미/놀이의 경계가 그렇게 엄밀하지는 않다. (감사로 한다면) 일도 마치 놀이처럼, 취미처럼 할 수 있지 않을까. 등산, 스포츠, 낚시 같은 취미생활에도 삶이 충분히 개입된다. 여기에는 지겨움이 들어갈 틈이 없다. 현대적 삶의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인간의 정신 상태인 지루함, 지겨움, 권태를 가장 잘 묘사한 철학자가 하이데거다.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권태로움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내 손 안에 들어있고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물로 생각할 때, 감사로 받아들이게 되면 지겨움이나 권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감사로 받아들이는 그 한 순간 한 순간, 그 카이로스(kairos, 의미의 시간)가 그리스도의 임재의 시간이 된다. 꽉 찬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권태나 지겨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겨를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삶의 주인이냐 하나님이 주인이냐, 누구를 주인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그게 일이든 취미든 권태를 덮어버릴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알고 즐거워하고 누린다면, 우리의 삶이 권태나 지겨움의 시간이 될 수는 없다. 

진행_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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