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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위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 hansewan
  • 조회 : 3431
  • 2015.09.08 오후 12:30

 

 

교회사 인물/ 이그나티우스

  

  

● 안디옥의 성 이그나티우스(Saint Ignatius of Antioch)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제자로 주후 70년부터 107년까지 37년동안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제3대 감독으로 사역했던 인물로, ‘이그나티우스 데오포로스(Ignatius Theophoros)’ 즉 헬라어로 ‘하나님을 전하는 자’라고도 불렸던 신실한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 때(98∼117년) 로마로 압송되어 원형극장에서 들짐승에 의해 순교 당했는데, 그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까지, 즉 사도들이 순교당한 직후, 기독교가 유대땅에서 출발하여 헬라와 로마 세계로 퍼져나가는 전환기에 크게 쓰임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순교를 열망하였고 그의 바람대로 순교당한 천국지향적 신앙인으로 유명하다.

 

그러면 이그나티우스가 사역했던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예루살렘교회가 스데반집사의 일로 핍박을 받을 때 흩어진 성도들이 이주하여 처음 세운 교회로, 세계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교회이다. 수리아의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제국 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따라서 당시 손꼽히는 국제적인 도시에서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늘 읽은 행11장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 복음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하여 교회를 든든히 하였다. 바나바는 이때 사울(바울로 이름을 바꾸기 전)의 고향 다소까지 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함께 사역하여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이로 인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인들’(기독교인들)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로 이름 붙인 사람은 바로 이그나티우스였다.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서신에서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하고 있다.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에 유대 본토의 교인들을 돕기 위해 안디옥교회가 일종의 성금을 거두어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보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는 이미 당시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행13장에 보면,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구별하여 세워, 복음전파를 위해 이들을 이방세계로 파송했다. 이후에도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선교의 대표 교회로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이같이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빛나는 신앙적 전통을 가진 교회였고, 초대교회 시절 바로 그 교회의 감독으로 섬기다 순교당한 이그나티우스는 사도들이 죽은 다음 교회의 역사를 이어간 속사도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순교 시기를 고려해 볼 때, A.D.30-3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의 칠십여 평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잉태된 자"라는 별명으로 불려졌을 정도로 신실했다.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말씀하시며 무릎에 앉히고 축복하셨던 바로 그 어린아이가 이그나티우스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2세기 기독교 사회에서 이그나티우스에 대한 존경과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기초 자료는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서신들이 중심을 이룬다. 

  

폴리갑, 이레니우스, 유세비우스 그리고 제롬 등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A.D.108년경 트라야누스(트라얀)황제 때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어떤 죄목으로 그가 로마군인들에게 체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사로잡혀 지금의 터키 북서쪽에 위치한 드로아에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압송되고 있었다. 열 명의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서 압송되어 가는 도중 그의 일행이 서머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감독 폴리갑을 비롯한 서머나 성도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고, 에베소 등의 교회 대표들과도 만나 도움을 받았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들이 떠난 후 서머나에서 그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고, 또 앞으로 갈 로마의 교회에도 편지를 써 그들이 자신의 사면을 위해 탄원하지 말도록 부탁했다. 그의 이름이 기록된 서신은 모두 15점인데, 그 가운데 7점이 대체로 진정한 그의 작품으로 인정된다. 그의 일곱 편지는 로마를 비롯, 요한계시록의 일곱 도시 가운데 세 도시인 에베소, 빌라델비아, 서머나에 보내졌으며, 서머나 감독인 폴리갑에게도 보냈다. 이 서신들은 교회사에서 ‘2세기 교회가 전해준 가장 아름다운 보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되어 왔다. 

  

그 중에서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순교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로마교회가 교회들 가운데 사랑의 공동체로서 가장 모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바로 그 로마로 가는 길에서 마침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면서, 따라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특권층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면을 얻어내게 된다면, 제자로서 완성되기 위해 걸어가는 길에서 자신이 벗어나게 될까 걱정하고 있다. 

  

그는 바울과 달리(빌1:22이하)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갈림길에서 단호히 죽음의 길을 선택했으며 순교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순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 기울어가는 것이며, 기독교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며,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고난의 모방자가 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로마 교인들이 그의 육신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마음을 더 귀중하게 여겨줄 것을 당부했다. “나는 내 자유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알곡으로 맹수 이빨에 갈아져 하나님의 순수한 떡으로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맹수들이 나의 무덤이 되고 나의 몸을 남김없이 삼켜서 내가 잠들 때 내가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기독교는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을 때 가장 위대합니다.”라고 썼다. 그가 이처럼 열렬히 순교를 사모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만이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그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의 표현이었다. 그가 진정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뒷걸음치게 하는 나약함이었다. 그는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에게 힘과 절개가 있도록 기도해주기를 부탁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를 닮고, 그 고난을 나누며, 자신도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뜻한다고 여긴 것이다.

 

다른 편지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이단 교리에 대해 경고하고 정통교리를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당시 기독교인들 가운데, 신약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안식일을 준수하는 등 유대교 의식을 계속 따르는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을 비판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오직 외형으로만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고 주장하는 가현설주의자들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명확한 보증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그를 위한 헌신이 모두 헛된 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영혼과 육체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육체보다 우월하며, 영적인 사람이 육체를 따라 사는 것도 영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단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감독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 직분을 집사와 장로와 감독의 셋으로 나누었으며, 마치 수금의 현이 수금에 밀착되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밀착되며,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밀착된 것 같이 장로들이 감독에게 밀착되어야 교회의 조화로운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만약 감독이 없다면 교회도, 세례도 없고 성찬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처럼 그는 교회의 성직자들의 위계체계를 옹호하고 감독의 권위를 강조했다. 다시말해 이그나티우스는 당시 심각했던 교회의 분열과 이단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는 감독을 중심으로 통일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서신에서 구약성경을 별로 인용하지 않는다. 그는 마태복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일부 문구는 요한복음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그에게 깊은 영감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바울 서신이었다. 그는 특별히 고린도전서를 좋아하여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그가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 보면 바울의 에베소서와 유사한 구절들이 많다.

  

그는 사도 바울을 많이 칭찬하는데, “바울은 거룩하심을 입고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주님께 은총을 받은 인물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이를 때에 그의 발자취 가운데서 발견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결코 자신을 사도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 놓지 않았다. “베드로와 바울이 한 것처럼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였으나 나는 한 죄수에 불과합니다.” 

  

  

● 이그나티우스는 실로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철저히 버린 신앙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과 구속의 일에 대하여 한 비유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말씀한 바 있는데, 이그나티우스는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순수한 빵"이 되는 길은 "야수의 이빨에 의해 갈아지는" "하나님의 밀"이 될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한 알의 밀"이 되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피 없는 순교이다. 자신을 부수고 썩혀 자기 존재가 사라질 때, 싹이 나고 열매를 열림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 되기"는 "세상이 더 이상 나의 몸을 보지 못할 그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이그나티우스의 말에서 힌트를 얻는다. 

  

참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때이다. 나는 과연 신앙생활 가운데서 나를 부인하고 살아가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제자의 길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오늘 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이 살아있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데서 시작된 것이다. “No Cross, No Crown”(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이라는 격언이 있다. 누가 고난을 즐겨 하랴마는 죽음의 고통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는 것이 기독교적 역설이요 신비이다. ‘나를 죽여주시오!’ 하고 부탁하며 순교자의 영성으로 살았더 이그나티우스는 후대에 그의 뼈가 수거되어 안디옥으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 6,7세기경에 다시 로마로 이관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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