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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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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 조선의 현실 모습

  • hansewan
  • 조회 : 1801
  • 2017.11.21 오후 08:10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상황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한국최초의 의료선교사인 알렌은 1884. 9. 22에 한국에 도착하여 1885. 4. 10에 한국최초의 병원인광혜원을 세웠습니다. 그 후 1885. 4. 5에 우리나라에 도착한 언더우드 미국선교사는 알렌과 함께 광혜원에서 진료를 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도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겪은 경험담을 선교사(宣敎史)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년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땅에 도착한 첫날부터 모든 것이 충격적인 것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나 음식, 그리고 그들이 몸담아 살고 있는 가옥의 모양이야 이미 각오한 바 있어 오히려 호기심이 일고 재미있기도 한 것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이념은 너무나 뜻밖의 것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양반이나 귀족사회의 그것과 상민이라고 일컬어지는 백성들의 그것이 너무도 엄청나게 달라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민 또는 평민이라고 불리는 백성들은 무엇을 배우거나 알고자 하는 의욕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차 없이 잘라내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쥐어 짜이고 빼앗기면서도 왜 빼앗기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왜 빼앗기는 것인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빼앗기며 쪼들리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이유를 따지는 일도 없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름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배가 등에 달라붙어 도무지 힘을 쓸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식을 끝없이 주렁주렁 낳고, 끝없는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별다른 원망 없이 그냥저냥 살고들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인생 그것이라고들 믿고 있었다.

아예 배우고자 하는 뜻을 가질 줄 몰랐다. 배울 수 있는 것은 특권이었고 그 특권은 양반이나 사대부의 자제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눈뜨기를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눈이 뜨여 사리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화근이 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가난 속에 스스로 머리를 틀어박고 그 가난 이외에 아무 것도 보려고 하는 것 같지를 않았다. 가난은 당연히 불결과 겹쳐져 있었다. 그들은 가난에 대하여 별로 불편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마음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물을 아무데서나 길어다 식수로 썼고 또 배설하는 일을 깔끔하게 뒤처리할 줄 몰랐다.

상민의 아내들은 아이를 쑥쑥 빠뜨리듯 낳았다. 흙집 흙바닥 위에 거적자 리 정도를 깔고 아이를 그 위에 쏟아놓는 것이 예사였다. 유아 사망률이 대단했다.

조선 땅에는 기이하다고 생각될 만큼 천연두가 극성이었다. 죽어가는 사람 의 절반은 천연두 때문에 죽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시두(時痘)라고도 부르는 이 병이 집안에 전념되어 들어오면손님마마’‘별성마마라고 부르면서 마치 위엄있는 손님이나 온 듯이 식구다 언행을 조심하며 그 병을 인격시 했다. 조선 사람들은 천연두를 별성마마라고 부르며 호구별성(戶口別星)이라고 해서 천연두를 집집마다 가져다 앓게 하는 여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믿는 이 귀신은 원래는 중국 귀신인데 그 귀신이 가끔 먹을 것을 바꾸어 먹으려고 조선 땅으로 건너오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 귀신을 잘 대접한다는 표시로 천연두를손님이라고도 부르는 것이었다. 그 손님마마가 곱게 물러가 주십사고 음식대접으로 푸닥거리를 하거나 굿을 했다. 그것도 안 되는 가난한 집에서는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싹싹 비벼 빌었다. 대개는 얼굴을 엉망으로 얽어 못쓰게 만들어놓고 떠나는 이 병 앞에서 사람들은 쉬쉬하며 말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매독환자도 흔했고, 조선사람 전체가 우글거리는 회충을 뱃속 가득하게 껴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피부병과 무좀 정도는 병이라고 생각지도 않을 정도였고, 디스토마 환자도 혼했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콜레라는 전국을 휩쓸었다. 장안에서도 죽는 사람의 수효가 하루에 수백 명씩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수구문 밖으로 시체를 옮겨 버리더니 점차로 시체를 옮기는 일조차 포기했다. 환자가 발생했다 하면 달려들어서 환자를 끄집어내어 실어다 버리고 그 집을 불 지르고 하던 것도 초기의 일이었다. 전염병이 급속도로 번져가자 이제는 성한 사람들이 환자가 발생한 집을 피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콜레라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엉뚱한지, 조선 사람들은 콜레라가 쥐의 귀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호열자에 걸리는 건 쥐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콜레라균이 쥐의 형상을 하고 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쥐의 발을 거쳐서 인체에 숨어들어 내장에 까지 파고드는 것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콜레라 환자의 다리근육 경련도 쥐 귀신의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 대문에다 고양이 그림을 그려서 붙여놓았다. 그것이 유일한 예방이라는 것이었다. 쥐 귀신이 덤벼들지 못하게 하려면 고양이를 내세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농촌에서는 집 둘레에 새끼줄을 쳐놓고 그 줄에다 줄레줄레 부적을 매달아 놓기도 했다. 이것이 콜레라 귀신을 막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옛 모습입니다. 우리조상들이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이는 캄캄한 어두움이었습니다. 이 어두움을 누가 밝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에 감동된 충성된 주님의 젊은 종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빛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펼친 알렌의사의 나이는 26(1858년생)였고, 알렌보다 1년 뒤 우리나라에 온 언더우드도 26(1859년생)의 총각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전했습니다. 이 빛이 지금은 이 나라 구석구석에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맺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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