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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

  • 성경말씀 : 고전15:20~26,히 2:14~16
  • 설교자 : 한세완 목사
  • 설교일 : 2023-04-09


2023.4.9(부활주일) 고전 15:20-26,히2:14-16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


♠사람은 1분 전에 죽었어도, 고인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옛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고인이 아니십니다. 이 말은 19세기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가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고인이 아니시다.”

♠맞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 계셨고, 장차 올 분으로 요한계시록 1:8절에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 없어진 과거의 고인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신 분입니다. 이 점이 기독교의 놀라운 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그 믿음을 달리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옛 영웅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계시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이곳에 현존하시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뺀다면 신학도, 교회도, 교리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지금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말을 쉽게 옮김),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을 통하여 이제는,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고 고백했습니다. 


♠부활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최대의 진리입니다.

부활의 진리는 자연적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자연’은 부활을 말하지 않고, 사멸과 죽음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죽음은 사람의 무지를 가장 잘 드러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죽어 본 사람이 없고, 죽음을 해부하고 관찰할 시간도 인간에겐 부족합니다.

모세는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다’고 시편을 통해 말했습니다. 

(시90:9-10)“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사람은 죽음을 애써 외면하려 하면서도 철저히 죽음에 매인 존재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2장은 말씀하길, 죽음을 두려워해서 사는 내내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죽음에 이르셨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4-15)


♠이 성경의 말씀처럼, 예수께서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놓아주시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의 힘을 가진 존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애 버리시고,  죽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풀어주시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에는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교회에서 청년들이 하는 연극을 보았습니다. 

연극의 주제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성경 이야기였습니다. 

이 연극을 보신 목사님은 연극의 한 대목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나사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죽었다가 살아보니까 뭐가 달라졌습니까? 당신에게 달라진 것이 뭡니까?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뭐가 달라질까요? ’ 

연극 안에서 나사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희망은 ‘더 이상 두려움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종노릇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날 뿐이라고 생각하는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죽음 이후 아무것도 없으니 ‘여기서 놀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하는 방탕함, 방종에 합류하지 않아도 됩니다. 

♠19세기 말엽 우리나라에 오셨던 유진 벨 선교사님- 1895년 한국에 파송되어 와서, 광주 목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20여개의 교회와 수피아 여학교 외 많은 학교를 세우셨던 유진 벨 선교사님. 그 후손들은 5대째 아직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3대손되는 인세반 유진벨 재단 회장은 기독교 간증 프로에 나와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과거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대개가 20대의 젊은 선교사였다는 것입니다. 30대면 선교사로서 고령이고, 주로 20대가 선교사로 왔답니다. 선교사들이 당시 평균 3년이면 사망하였기 때문에, 젊고 면역력이 강한 20대가 주로 선교지로 파송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20대의 꽃다운 젊은이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선교지로 갔고, 보통 2,3년 안에 풍토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선교사들은 죽을 각오로 간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갔다고 해야 맞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세반 회장은 그 간증 프로에서 “믿는 사람들이, 아니 죽는게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도전적인 말을 했습니다. 


♠ 부활이 죽음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이유를,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대답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비교적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리스 헬라 문명의 세례를 받은 고린도 라는 도시의 기독교인들은 부활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의문에서 시작한 질문일 겁니다. 

대개 이런 질문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다고 봅니다.”(12절).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합니까? 어떤 몸으로 돌아옵니까?”(35절)

* 자연인으로서 예수의 부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할 수 밖에 없는 궁금한 점들을 다루며, 바울은 조금도 주저함없이 확고하게, 예수님의 부활과  이후 이어질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신 것은, 실제였고, 베드로를 포함하여 열두 제자와 500여 형제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부족한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이 세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이 세상의 삶 밖에 없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가여운 (새한글성경)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심지어,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이 없다고 하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믿음도 헛되고, 주님을 믿고 죽은 사람도 망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고전15:17,18“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이라는 한 장의 벽돌을 뺀다면, 그 모든 것이 폭삭 주저앉아 버릴 것입니다. 그 말은 부활이 그만큼 기독교의 심장부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사람의 죄를 해결하였다면, 죄로 인한 값인, 죽음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죽음이 해결되지 않고, 죽어서 천국가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에 대한 선포만 존재한다면,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은  실패한 한 젊은 몽상가의 슬픈 죽음으로 치부되었을 것입니다.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유대의 한 젊은이를, 누가 기억해주며, 그것을 무한한 희망으로 삼아,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소망으로 누가 신뢰하며 자기 인생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고전15:14-15“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부활은 우리 생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몸을 부여받아 살 ‘놀라운 미래’를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고, 담대하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55절“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히브리서 2:15절 말씀처럼, 주께서는 사망을 이기신 부활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아직도 부활의 믿음을 토대삼은 삶을 계획하지 못한다면, 

창피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곳으로 부터 우리의 헌신과 담대함과 희생과 유혹을 이기는 원동력이 나올 것입니다. 30절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왜 매시간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겠냐고 바울은 묻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함’ 때문 입니다. 

32절 하반절 “...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 아! 부활은 무엇입니까? 부활은 황홀한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을 입어,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살아가는, 하늘의 유업입니다. 

♠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 눈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제자들은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했다고, 성경 눅24:41절은 전합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무서워하며 놀라워하는 제자들은, 부활을 모르기에, 보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눅24:37).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며칠 전, 자신들의 눈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참혹하게 돌아가셔서 장사 지냈던 예수께서, 다시 눈앞에 나타나 말도 하시고, 심지어 생선을 잡수실 때에, 그 사실을 환상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히려 제자들에게 “나를 만져봐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있다.”(눅24:39). 말씀하셨고, 그리고 생선 구이 한 토막을 그 앞에서 받아서 잡수셨습니다. 

정확히 육체였습니다. 영이 아니라 몸을 가진 육체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예수믿는 우리들도 차례대로 부활의 몸을 입게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요,  우리는 다음 열매입니다. 

고전15: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3절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죽음’은 사라져 없어질 마지막 원수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죽음으로 헤어질 때, ‘또 만납시다!’를 외칠 수 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를 찬송할 수 있습니다. 


♠작년 이맘 때 ‘부활주일 설교’에,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의 얘기를 한 것이 지금까지 기억납니다. 생의 마지막 부분을 ‘기독교인으로서’ 불꽃처럼 살다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8개월 전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인사 영상을 찍어 남기며, 영상으로 마지막 인사를 남겼습니다. 

자신이 없는 세상을 살아갈 모든 사람들에게  

“잘 있으세요 여러분. 잘 있어요.”라고 손을 흘들며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평생을 글을 쓰는 문인이요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살아온 그분에게도  돌아갈 곳이 생겼고, 부활의 몸을 입을 소망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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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꼭대기나, 창공의 비행기에서 자유롭게 웃으며 떨어져 날다가 낙하산에 의지하여 안전하게 지상에 착지하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낙하산에 대한 신뢰 하나로, 공포가 아닌 즐거움을 만끽합니다. 그냥 떨어지면 공포에 질려 죽는 길일테지만, 등에 달린 낙하산은, 공포를 없애며, 극한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가장 든든한 생명선이 됩니다.

참으로 기묘하고도 극한적인 대조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차례대로 부활할 것도 믿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성도는 죽음으로 수직 낙하하며, 비명을 지르며 공포의 어둠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복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엄밀하게 죽음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고후 5:8 “(새번역)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죽음은, 성도의 성화가 완성되어 영화롭게 되는 순간입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가까이에 묘지를 조성하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죽은 자들의 부활이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루터 교회는 ‘영원주일’이라 이름붙인 주일을 지키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주일은 세상을 떠난 성도와 가족을 추모하는 한편, 자신에게도 찾아올 죽음과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그려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부활주일은 우리에게 ‘영원주일’이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그려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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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기독교인에게 희망입니다. 부활이 주는 희망은 강력합니다. 

죽음 조차도 이길 수 없는 희망이라면, 희망의 최고봉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근본 문제는 양식이 없어서도 아니요,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이 세상과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설명해줄 사람들을 찾지 못하여,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여 방황하며 헤매고 있습니다. 고관대작에 앉은 사람도,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람도, 해결할 수 없고 알 수도 없고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가장 명확한 생의 종결점앞’에서, 떨며 삽니다.  



♠ 구주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1;25-26)“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기독교 최대의 메시지인 부활에 두십시오. 주님은 고인이 아니시며, 여러분도 고인이 되지 않을 것이며, 부활의 때까지 안식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고전 15:57-5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




성경말씀 : 고전15:20~26,히 2:14~16
설교자 : 한세완 목사
설교일 : 202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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