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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장관 삼성창업가의 질문에 답하다

  • hansewan
  • 조회 : 456
  • 2022.01.05 오후 07:13

이어령 전 장관 '삼성 창업가 이병철의 하나님'에 답하다































이어령 전 장관 ‘삼성 창업가 이병철의 하나님’에 답하다

24가지 질문 개신교 관점에서 재정리 … “질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암 투병 중인 이어령(88) 전 문화부 장관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는 전 인류를 향해 “역사적으로 항상 대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이전보다 나은 번영이 이뤄졌다”면서 “이 팬데믹 패러독스의 마지막 희망은 기독교”라고 밝혔다.

이 전 장관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평창로 영인문학관에서 국민일보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팬데믹 위기 극복을 위한 솔루션으로 ‘코로나 패러독스(Corona Paradox)’라는 새 어젠다를 제시했다. 왕관을 상징하는 코로나가 지독한 병명이 된 것도 역설이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면 더 나은 세상이 열린다는 것 또한 역설이다.

“중세 시대 페스트로 인해 기독교 기반이 흔들리던 때와 같은 위기를 맞이했다고 봅니다. 이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현대인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러 가지 종교적 가치와 구제를 찾게 됩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제일 큰 죄악이 ‘휴브리스(Hubris)’ 즉, 인간의 오만인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또 전 인류가 이 세상 모든 가치 가운데 생명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 전 장관은 마지막으로 시련 뒤 찾아올 희망을 설파했다. 그는 “기독교 문명의 본바탕인 유럽은 물론 한국도 많은 시련과 핍박을 받고 있다”며 “그러나 페스트라는 재앙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파리도 페스트가 지나간 뒤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발전했고,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늘날 불신받고 쇠퇴해가는 기독교에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인간의 오만과 그로 인한 재앙을 극복했던 그 힘을 되살려내는 것이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지성의 큰 산맥이었던 이 전 장관은 2007년 7월 일본 도쿄에서 고(故)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이 인본주의적 성과를 뛰어넘어 영성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후 14년째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모토로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메신저의 사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1월 달력을 막 넘기려는 순간, 고대하던 전화 연락이 왔다. 국민일보 창간 33주년(12월 10일)을 앞두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인터뷰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세계적인 석학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이 시대 지성인의 상징인 이 전 장관을 만나기는 참 쉽지 않았다. 인터뷰 일정을 여러 번 조율했지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다음에…’라는 세글자로 수차례 연기되곤 했다. 그의 오랜 지인 김명기 목사(국민일보목회자포럼 사무총장)와 함께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을 대신해 그의 지혜를 빌리기 위해 지난달 30일 투병 중인 것을 알면서도 이 전 장관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다.



이 전 장관의 서재는 서울 종로구 평창로 북한산 자락의 영인문학관 내 2층에 있다. 영인(寧仁)문학관은 이 전 장관과 그의 아내 강인숙 교수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딴 명칭이다. 한옥 대청마루처럼 넓고 아늑한 2층 서재는 도서관 한 채보다 커 보였다. 그의 서재에는 ‘광복 76년, 미래 24년’ 대한민국 100년이 꽂혀있었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고 문학과 정치, 문화와 문명을 가로지르며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로 시대를 선도하는 우리나라 대표 지성의 모습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 장관의 비밀스러운 서재의 문을 여는 순간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접목하고 사유하며 사회의 변화와 미래를 읽어내는 통찰력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한국인 정체성에 관한 담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무궁무진한 히스토리 등 이 장관의 담론에 대한 기대감은 형언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산업화를 몸으로 체험한 이 전 장관을 통해 인류의 삶과 문화를 해독하고 앞으로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리해 볼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만난 자리는 채 40여 분을 넘기지 못했다. 이 전 장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지성과 영성의 세계를 넘나들었다.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단독 인터뷰를 하기로 했지만, 힘이 많이 부치는지 더 진행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전화와 이메일로 대신하기로 하고 기약 없는 작별을 고하고 영인문학관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찡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15일 가슴 죄며 기다렸던 답장이 왔다. 이 전 장관은 수시로 찾아오는 호흡곤란 등 몸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명불허전 최고의 지성과 영성의 진수를 들려줬다. 이 전 장관에게 물은 질문은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임종 전 가톨릭 신부에게 던진 질문을 개신교 개념에 맞게 다시 정리한 것이었다. 이 전 장관은 인간이 짊어진 인생의 3대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에 대한 명쾌한 답을 들려줬다.

짧은 만남, 긴 여운을 남겼다. 역설(逆說) 또 역설이었다. 죽음이 끔찍한 일상이 된 이 전 장관은 “인류가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경험하게 되었다”면서 “세계대전보다 더 거대한 죽음 앞에 벌거벗은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상심을 되찾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질문은 의문으로 시작되는데, 단지 물음표에 느낌표가 따르지 않으면 빈 깡통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그 느낌표를 얻기 위해 철학을 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스 말로 ‘타우마제인(Thaumazein·놀라움)’이라고 했다. 물음표는 지성이고 느낌표는 감성이요, 영성이다. 이 전 장관은 물음표와 느낌표, 그 문지방 사이를 아직도 헤매고 다닌다고 고백했다. 이 장관의 사유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현장에서 금방 건져 올린 생선처럼 싱싱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신학’에서 니은(ㄴ)을 빼면 시학(詩學)이 된다”고 한 말이다. 신의 존재를 언어의 기호로 보여주려고 도전하며 모험하고 있다는 고백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라틴어 3대 경구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 그리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의 지혜를 알기 쉽게 설명했다. 암과의 투병, 죽음과 친해지면서 자연히 운명을 사랑하고 탄생의 신비를 배우며, 생을 담당하고 의연히 살아내고 있는 이 전 장관의 모습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살아있는 성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며 새로운 탄생의 신비를 발견했다는 그의 고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은 이 장관과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 물음: 온 지구와 전 인류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종교가 현실적으로 그 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으시는지요?
- 답: 이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오늘날 모든 현대인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여러 가지 종교적 가치와 구제를 찾게 되었다고 봅니다. 첫째로, 인간의 능력으로 쌓아 올린 문명과 문화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가를 보았습니다. 쓰나미로 한 도시가 사라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요. 기독교에서 제일 큰 죄악이 ‘휴브리스(Hubris)’, 인간의 오만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았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생존의 수단 때문에 생명의 귀중함을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 각국의 차이를 GDP의 숫자로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이제는 코로나의 발생 수와 사망자 수로 바뀌었습니다. 전 인류가 이 세상 모든 가치 가운데 생명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인간은 죽는 존재이면서도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셋째로, 특히 기독교 국가와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기독교 문명의 본바탕인 유럽은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시련을 겪었어요. 꼭 중세 시대 페스트로 인해 기독교의 기반이 흔들리던 때와 같은 그런 위기를 맞이했다고 봅니다.

- 물음: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문제 제기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듣고 싶습니다.
-답: 저는 그것을 ‘코로나 패러독스(Corona Paradox)’라고 부릅니다. 그 이름부터가 그렇죠. 코로나는 예수님과 천사들 뒤에 원처럼 비치는 빛입니다. 왕관이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성스러이 여기는 것이고, 천사들의 것입니다. 이름부터가 익살맞지 않습니까? 자유의 여신상이 머리에 뭘 쓰고 있습니까. 뾰족뾰족한 것. 그게 코로나입니다. 자유의 여신상 머리 위에 뿔 돋은 것이요. 그게 바로 코로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좋고 성스럽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죄악의 팬데믹이 되고 가장 기피의 언어가 되었을까요.

이 코로나로 인해 전 인류가 현재 대재앙을 겪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대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인구도 불어나고 그 이전보다 번영이 이루어졌습니다. 페스트도 그랬습니다. 이러한 패러독스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런던 인구 3분의 1이 희생당한 1664년의 페스트고, 엎친 데 덮친 경우로 다음 해 런던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이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비롯해 쟁쟁하고 왕성한 지식인의 출현과 산업혁명, 그리고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로 영국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어요. 런던만이 아닙니다. 페스트라는 재앙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파리 역시도 페스트가 지나간 뒤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발전,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화려한 꽃을 피웁니다.

이것이 바로 팬데믹의 패러독스입니다.
저는 이 패러독스의 마지막이 기독교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불신받고 쇠퇴해가는 기독교에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고 인간의 오만과 그로 인한 재앙을 극복했던 그 힘을 되살려내는 희망입니다. 이는 ‘크리스처니티(Christianity)’가 새롭게 해석되고 기독교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기회일지 모릅니다. 흔한 말로 “위기는 기회다.” 기독교에 늘 있어온 일 아닙니까. 핍박받았잖아요. 교회는 지금도 핍박받고 있습니다. 마치 코로나를 옮기는 병의 온상처럼 인식되고 있어요. 교회는 늘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병만 옮긴다고 예배도 못 하게 핍박을 받지 않습니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대한민국의 주요 역사적 고비마다 시대정신을 밝히는 굵직한 담론을 내놨다. 20대 시절인 1950년대엔 기성문단에 대한 권위주의적 맹목적 신봉을 비판하며 ‘우상의 파괴’라는 평론을 발표해 이목을 끌었다. 30대에는 한국문화론을 설파했다. 50대 들어서는 서울올림픽 슬로건인 ‘벽을 넘어서’로, 60대 키워드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였다. 새천년 문턱을 넘던 70대엔 차가운 디지털이 따뜻한 아나로그를 품어야 한다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을 말하는 ‘디지로그’의 문을 열었다.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상호보완성’을 강조했다. 2010년 80대부터는 ‘생명이 자본이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오기 전에 그는 이미 기독교 정신의 핵심 가치인 생명의 소중함과 상생의 가치가 우선 반영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병마와 싸우기도 힘겨운 구순의 문턱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했다. 귀 있는 자들의 몫은 경청이라는 말밖에 달리 형용할 길이 없었다.

- 물음: 화제를 좁혀보면 인간의 오만과 코로나 패러독스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한몸에 지녔던 이병철 회장께서 죽음의 문제와 대면하셨을 때 던진 질문이 그것이지요. 그때 던진 질문들이 지금 포스트코로나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우러나오는 궁금증일 것 같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이병철 회장이 가톨릭 신부님께 여쭈었던 스물네 가지 질문을 다시 새롭게 정리 요약해서 묻겠습니다. 이번에는 당사자들인 신학자도 교직자도 아닌 한국의 대표 지성에 여쭈려 합니다.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이시니 어떤 가설이나 개인적 의견이라도 우리에게 전해주실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답: 이 큰 질문을 어찌 이 자리에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명약관화라는 말이 있듯이 진실하다면, 그것이 진리라면, 사자성어로 요약하듯이 짧은 답변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글을 쓰는 자유로운 사람이니 비유, 스토리텔링, 상상력, 추리력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질문 1.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하나님이라는 말을 부모님이라고 바꿔보세요. 우리가 부모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또, 하나님이라는 말을 그 흔한 여친이라는 말로 바꿔보세요. 여친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믿고 살아왔지 정말로 나를 낳아주셨는지 나를 사랑하시는지 의심해온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여친도 만나는 동안 한 번도 그 사랑을 의심하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에 관계가 이어진 거예요.

그런데 부자지간이나 연인 사이에 증명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미 그건 끝난 이야기예요.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정말 저를 낳으셨는지, 저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증명해보십시오”라고 한다면 ‘DNA 감정을 해주십시오’라는 말이 되고 지금까지 저를 사랑하신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이미 그 부모 자식 관계는 파탄 난 것입니다. 연인 사이도 똑같아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어느 날 차를 마시면서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증명해” 하면 그 관계는 끝이 난 거예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모 자식 관계가 그렇고 연인 사이가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증명하는 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요. 그것이 바로 가족의 사랑이고 남녀의 사랑이고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신앙의 세계인 거지요.

- 물음: 하지만 믿지 않는 자도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파탄 난 관계라 하더라도 그 아들, 그 여친을 그냥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증명할 수 있다면 그들의 요구대로 증명해 보이면 되지 않을까요?

답: 이미 도마가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내 눈으로 보지 아니하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도 증명해 보이라고 했지요.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증명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신이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증명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신을 증명할 수 있겠어요. 예수님은 옆구리의 창 자국과 손의 못 자국으로 도마의 회의에 대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부활을 증명해 보였어요. 증명의 몫은 전지전능한 신보다 지능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칸트, 데카르트 등 많은 학자, 수학자, 과학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썼어요. 자신이 유발 하라리가 얘기하는 호모 데우스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을 증명하려고 한 회의론자에게 직접 하신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주면 됩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자다”(요 20:29)라고요.

질문 2. 하나님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지 않을까요?

기독교에서는 종교를 ‘릴리전(religion)’이라고 합니다. 끊어진 끈을 다시 잇는다는 뜻이지요. 또 한편으로는 정독하여 자세히 읽는다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원죄로 인해 끊어진 관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실낙원이라고 하는 현실상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그 끊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야지만 하나님을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육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를 보고 그때 대체 신은 어디 있었냐고 하지만 직접 그 수용소에서 생활한 빅터 프랭클이 쓴 『밤과 안개』를 보면 신은 오히려 아우슈비츠 같은 지옥의 극한상황에 똑똑히 나타난다는 겁니다.

극한상황 속에서는 착한 사람이 악인이 되고, 악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지요. 먼 예를 들 필요도 없어요. 요즘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드라마 <오징어 게임> 그대로입니다. 극한상황에 놓였을 때 모든 사람이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신도 그 모습을 똑똑히 드러내 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극한상황 속에서 릴리전, 끊어진 관계가 다시 이어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질문 3.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에 관해서는 앞의 질문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에 관해서만 덧붙이겠습니다. 창조주가 없다면 우주 만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주 만물은 있지요. 그것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몇 월 며칠이면 어느 별이 어느 위치에 오고 태양과 지구의 위치가 어떻게 되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수학적·물리적 질서가 있어요. 그것을 기획하고 만든 창조주가 없다면 질서가 있겠습니까. 우주 만물이 존재하는데 그 만물에 속성과 질서가 없다면 그것은 우연의 결과요 창조주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물에 속성과 질서가 있다면 어떤 신이든 그것은 그에 의해 기획된 결과지요.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이야기했지만, 결코 신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체 자체를 하나님이 쓴 또 하나의 바이블로 여겼어요. 모든 우주의 질서에서 하나님 말씀을 발견하고 읽어낸 것이에요. 우주, 자연 자체가 또 하나의 성경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자신에게는 그것이 우리가 읽는 성경보다 더 진짜 성경 같았던 거예요.

뉴턴도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우주 만물이 단순히 우연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치밀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신의 존재를 느끼지요. 그래서 인력을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만드신 사물들이 가까워지려고 하는 사랑이요 친화력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질문 4.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요? 인간도 생물도 모두 진화의 산물 아닌가요?
진화 자체가 신의 프로그램이라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를 보면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동식물이 생기고 인간이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집니다. 이 모든 게 진화 과정과 거의 다를 게 없어요. 창세기에서 인간이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지는데 진화론도 인간이 제일 뒤에 만들어지잖아요.

태초의 빅뱅, 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물질과 에너지가 나누어지는 순간입니다. 이후 모든 진화 과정이 그 자체로 신의 섭리요 기획이라면 어찌 반박할 수 있을까요. 혼돈에서 질서로, 그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진화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날 DNA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신’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썸띵 그레잇(Something Great)’이라는 표현을 쓸 뿐이지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 실낙원에서 복낙원으로 가는 과정을 진화론과 대비해 더 구체적으로 풀이해볼까요. 초기 진화론자들은 진화의 원리가 먹고 먹히는 포식(捕食) 관계에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진화론 자체가 더 진화하더니, 그 원리가 포식 관계가 아닌 미셸 세르(Michel Serre, 1930~2019)가 말한 것 같은 기생(Le parasite) 관계, 숙주와 기생물의 관계에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런데 최근 학계에서 수없이 부정되고 거절되어왔던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5~2011)의 포식도 기생도 아닌 ‘심바이오시스 (Symbiosis)’, 공생 이론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토콘드리아 이론이지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함께 나누고 서로 도와주면서 산다는 ‘코이노니아(Koinonia)’와 같은 얘기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심바이오시스, 공생이지요.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도우라고 하잖아요. 즉 진화의 원리는 포식과 기생이 아닌 공생으로, 기독교적 가치관과 다를 게 없습니다. 참고로 린 마굴리스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에요.

질문 5. 언젠가 생명합성과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요?
삼십여 년 전에 했던 이 회장의 질문은 오늘의 바이오기술 B.T, 나노와 로봇의 N.T, R.T 그리고 AI 시대를 예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한 문제라 차라리 한 편의 우스개 이야기로 답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어느 날 초능력 AI 로봇이 신에게 도전합니다. “당신이 만든 인간과 내가 만든 인간, 어느 쪽이 더 우수한지 내기를 해봅시다.” 그러자 하나님이 웃으시면서 “어디 한번 해봐라” 하고 말해요. AI 로봇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처럼 흙을 모아 반죽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잠깐, 내가 만든 흙에 손대지 마. 흙도 네가 만들어”라고 했어요. 로봇을 만드는 금속, 플라스틱 같은 원자재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어요? 지구에 있는 모든 원자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신 창조주의 선물이에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하나님은 벌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옛날 이미지라는 얘기다. 예수님은 옆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시는 아주 친한 친구와 같은 분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인간은 아직도 무서운 하나님, 주먹을 불끈 쥔 하나님, 심판하는 하나님만 생각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의 신관을 아직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전 장관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끌어안고 포용하시며 용서하는 하나님”이라면서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질문 6.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는 걸까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신이 준 게 아니라 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범하여서 인간이 스스로 받은 벌입니다.

뱀이 뭐라고 했나요? 너도 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신처럼 눈이 밝아지고 지혜로워진다고 했습니다. 뱀의 말은 사실이었어요. 선악과는 지식의 나무, 신만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선악의 판단을 얻게 되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건 인간이 피조물이면서 조물주가 되려고 한 거예요. 이를테면 아들이 아버지가 되려고 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아버지가 나를 낳아줬는데 내가 아버지가 된다고요? 그건 패륜이지요.

내가 만든 물컵이 인간처럼 의식을 갖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에게 물 따르지 마. 날 왜 깨지도록 만들었어. 나를 왜 쟤보다 작게 만들었어.” 내가 만든 물컵이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불평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피조물이 조물주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뛰어넘으려 할 때 세계는 암흑과 혼돈의 세계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문명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 물음: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 착한 자, 자기를 믿는 자만 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히려 구제가 아니라 무서운 하나님으로 비칠 수도 있지요. 인간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신께서 그렇게 가혹히 벌을 주실까요?

- 이에 관해서는 그 유명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일화로 답해보겠습니다. 완벽한 성인이라고 칭송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습니다. 그런데 성자는 죽어도 썩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시체가 썩는 거예요. 그래서 그를 따르던 수도사 알료샤도 큰 절망에 빠져 매춘부 그루센카를 찾아가요. 처음으로 탈선을 결심한 겁니다. 그때 그루센카가 하나님은 성자뿐 아니라 악한 자도 버리시지 않는다고 얘기해요.

나쁜 짓만 하던 사람이 길 가다 목마른 사람에게 파 뿌리 하나를 뽑아줍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파 뿌리 하나를 내려 지옥에서 구제해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자고 악인이고 다 포용하려고 해요. 인간이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그런 깨달음을 얻고 알료샤가 다시 장로의 빈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깐 졸게 되지요. 그때 꿈속에서 가나의 결혼식처럼 천국에 큰 잔치가 열린 겁니다. 보니까 조시마 장로도 있어서 “성자님, 그러면 그렇지 천국에 가셨네요!” 하고 기뻐하는데 장로가 “너도 빨리 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알료샤가 “저는 착한 일은 아무것도 한 일 없어 못 가요” 하고 말해요. 그걸 들은 장로가 뭐라고 했을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파 뿌리 하나야, 어서 와.”

하나님은 벌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끌어안고 포용하는 게 하나님의 본질이지요. 재판하고 벌하는 그런 이미지는 다 예수님 이전의 옛날의 이미지죠. 오늘날 작가, 신학자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신은 심판하는 무서운 신이 아니라 우리를 구제하려는 사랑의 신이지요. 예수님의 출현입니다. 곁에 있는 신이에요. 저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도 그렇게 쓴 거예요. 옆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 계신 외로운 하나님. 그게 릴케와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직 무서운 신, 주먹 쥔 신, 심판하는 하나님만 자꾸 생각해요. 그건 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의 신관(神觀)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하나님은 용서하는 하나님이에요.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질문 7. 하나님은 왜 히틀러나 스탈린 그리고 갖은 흉악범 같은 악인을 만들었을까요?

이 질문을 히틀러에게 해보세요. ‘하나님은 왜 유대인 같은 악인을 만들었는가?’ 하고 역으로 질문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악인을 죽였노라’ 말할 거예요.

남북전쟁에서 남군과 북군이 기도할 때 뭐라고 할까요? 분명 ‘내가 상대하는 적은 모두 악인이오니 반드시 내가 오늘 전쟁에서 이기게 하소서’ 하고 얘기할 거예요. 남군이고 북군이고 똑같이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서로 이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남군과 북군이 동시에 하나님을 느끼고 그 사랑과 평화의 품에 안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과 영국군 사이에 일어났던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참호 속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군인들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처럼요.

독일 병사들이 캐럴을 부르고 촛불을 켤 때 그 소리를 듣고 영국군들이 참호 속에서 뛰어나와 함께 캐럴을 부릅니다. 그러자 독일군도 전쟁을 잊고 참호 속에서 기어 나와요.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전쟁은 휴전과 같은 화해의 무드로 바뀌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분명한 기적이었지요. 그들이 같은 기독교 문화를 공유하였기에, 어린 시절 촛불을 켜고 캐럴을 부르며 하나님을 맞이했던 평화의 기억이 있었기에 그런 엄청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에요. 공감의 신이 전쟁의 신보다 크고 강했던 것입니다.



질문 8.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앞에서 다 다루었어요. 피조물이 조물주가 되려고 한 것. 휴브리스, 인간의 오만, 그것을 원죄라고 하지요. ‘오리지널 신(Original sin)’은 무얼 훔치는 것 같은 개인이 저지르는 죄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사회 전체 시스템에 내재하고 있는 문명과 사회 자체에 죄가 있다는 겁니다.

부족한 인간이 마치 전능한 신처럼 지식과 지혜를 갖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원죄예요. 원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남을 심판하려 하니까요.

질문 9. 하나님은 왜 우리로 하여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나요?

그걸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인간만 자신과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었어요. 흙을 빚어 그 안에 숨을 불어넣는 것. 흙은 육체요, 숨은 성령, 스피릿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흙에다 불어넣은 영, 그게 자유의지예요.

다른 짐승들에게는 주지 않았어도 인간에게는 준 것.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게 물리적 장치를 하지 않았어요. 그저 스스로의 의지로 따먹지 말아라, 하고 말했을 뿐이죠.

질문 10.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인터넷 위키피디아만 검색해도 알 수 있는 이야기를 오컴의 면도날을 빌려 그 얼굴을 가리고 있는 수염을 대담하게 깎아 그 민낯을 보십시다.

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언어, 그것도 인간이 만든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밥’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맘마’라고 해요.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물으니 예수님이 “거듭나거라” 얘기해요. 그러자 니고데모가 “제가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어머니 속으로 다시 들어가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요. 그때 예수님은 “네가 사람의 말로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알아듣겠느냐”(요 3:2~4, 12)고 답답해하십니다. “거듭나거라.” 이것은 비유로 얘기한 것입니다. 진짜 다시 자궁에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성서에는 인간의 말 뒤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어요. 우리는 이를 통해 비유의 참뜻을 짐작할 수 있어요. 그걸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목사님, 신학자들이고 종교의 연구가들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알아듣지 못해요. 거듭나라고 하면 말 그대로 진짜 자궁에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것인 줄 압니다.

성경은 알다시피 아람어를 히브리어, 그리스어로 옮긴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다시 라틴어로 옮기고, 또다시 각 나라말로 옮긴 것이지요. 성서 무오류설이란 그 진리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지 번역된 자구 하나하나가 절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저마다 기술해놓은 것이 다 달라요. 똑같은 관용성서이지만 기술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다름을 그대로 남겨두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믿는 거예요. 한 사람에 의해 고쳐지거나, 인간의 논리에 앞뒤가 맞게 편찬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게 돼요.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저마다 다르게 듣는 수밖에 없어요. 다만 그것을 정직하게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들은 대로 옮기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고치는 게 아니에요. 신약의 경우가 특히 그렇지요.

질문 11.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계속 증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처음 했던 얘기를 기억하시지요. 믿지 않으면 성경 구절은 하나도 택할 게 없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었어요.

대홍수 때 노아의 방주에 모든 생물을 칸막이로 나누어 쌍쌍이 집어넣었다고 해요. 토끼 같은 초식동물이야 풀을 먹고 살겠지만, 그 안의 사자,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은 무얼 먹고 살까요? 토끼를 잡아먹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물고기는 물난리를 피해 노아의 방주에 들어오면 도리어 죽어요.

또 창세기에 인간이라고는 아담, 이브, 카인, 아벨밖에 없는데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이마에 표식을 받으니 다른 사람이 보고 나를 해치면 어쩌냐고 물어요. 이제 사람도 자기까지 세 사람밖에 없는데.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하나도 믿을 말이 없습니다.

지구와 공은 크기나 기능이나 비교도 안 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똑같은 구체입니다. 그런 구조적 관점에서 창세기의 제1 창조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시간을 분절(分節)한 거고요. 제2 창조 노아의 방주는 한 칸, 두 칸으로 공간을 분할(分割)한 것이죠.

나누어지지 않은 것은 ‘카오스(Chaos)’, 혼돈이죠. 즉, 카오스에서 시간과 공간으로 분절되어 있는 코스모스로 창조된 질서를 구조적으로 보여준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을 자구대로 직역하거나 멋대로 의역할 수 없는 번역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하지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돌덩이를 예수님께 보이면서 이것을 빵으로 만들어라 한 구절이에요. 널리 알려진 이 구절에서 우리는 빵을 떡이라고 번역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된 거예요.

주기도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양식’은 원문에는 분명 ‘일용할 빵’, ‘데일리 브레드(Daily Bread)’로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일용할 양식을 환유(제유법)로 나타낸 것이지요. 근데 그걸 떡이라고 해봐요. 떡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빵은 늘 먹는 거지만, 떡은 어쩌다 먹는 거예요. 그래서 예기치 않은 횡재를 보면 우린 “이게 웬 떡이야!” 하잖아요. 원래 의미대로라면 오히려 ‘밥’이라고 해야 할 거예요.

서양의 빵과 우리의 떡은 거꾸로라고 봐야 해요. 형태는 비슷해도 빵과 떡은 전혀 의미가 반대예요. 빵은 불로 구운 거고, 떡은 물로 찐 거예요. 제조 방법부터 달라요. 시루떡이라고 하잖아요. 저쪽에서는 오븐에다 굽는 거고, 우리는 시루에다 찌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밥이라고 번역하면 될 일일까요?

안 되지요. 빵과 떡은 돌덩이와 외형이 비슷하니까 납득이 되잖아요. 빵과 떡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체지만, 밥은 개개의 밥알들이 모인 것이지요. 그래서 밥알들을 뭉쳐놓은 밥은 돌덩이와 전혀 비슷한 점이 없어요. 밥이라고 하려면 마귀가 돌덩이가 아니라 모래를 퍼주면서 “이것을 밥으로 만들어라” 하고 말해야 해요. 아예 성서에 나오는 마귀가 한 말을 바꾸지 않으면 성립이 안 돼요.

우리는 오랫동안 빵을 떡이라고 함으로써 이 구절을 정반대의 의미로 읽어온 거예요. 제가 여러 번 이 구절을 지적했듯이 형태를 따르자면 떡이라고 해야 하고, 의미를 택하자면 밥이라고 해야 하니 차라리 ‘빵떡’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반 농담으로 말한 적이 있어요.

실제로 목사님이 예수님께서 “사람은 떡만으로는 살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자 시골 할머니가 그랬다잖아요. “별 싱거운 소리 다 듣겠네. 당연하지. 떡만 먹고 어떻게 살아 밥을 먹어야지.” 여기서 이 ‘떡’이라는 번역이 오역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질문 12. 종교란 무엇인가요?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성공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기업인, 세계 모든 것을 알게 된 과학자, 모든 것을 성취한 이들도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죽음이에요.

세상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다 죽었어요. 그들 중에 죽음이 뭔지 알고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면 종교는 없을 것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 종교의 이름이 무엇이라도 마지막 질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 또한 묻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그보다 더 기업으로 성공을 거둘 수가 있을까요. 그런 그조차 질문하고 있어요. 바로 그 질문 속에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는 그 필요성을 인정하였지요.

질문을 보면 답이 나온다고 했다.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논어를 정독하면서 맹자의 사상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공맹을 통해서는 사후 세계를 알 수가 없었다. 관상이나 역술로 죽음 이후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실감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경영인으로 평생을 달려왔지만, 문득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깨닫게 된다. 그는 세상과 이별하기 한 달 전까지 ‘그래도 기독교가 아닐까’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24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 회장이 종교의 필요성을 이미 공감한 상태에서 다시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했다. 인간에게 종교는 필수적임을 재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철학자 칸트도 결국 그 필요성을 인정한 셈이라고 했다. 이 전 장관은 아주 어려운 문제도 간단하게 쉬운 말로 설명했다. 그는 우주와 통하는 특수한 공간을 어머니의 자궁 속이라고 표현했다. 세상과 통하지 않는 곳이라야만 생명이 자라난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자궁과 우주의 ‘보이드(void)’가 통해져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거기가 바로 생명의 공간이요 창조의 공간이라는 말씀이다.

질문 13. 영혼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이미 찻잔 하나로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찻잔을 만드는 물질은 인간의 육체에 해당해요. 플라스틱 컵이면 플라스틱, 유리 컵이면 유리. 우리의 육체도 그 컵들의 질료처럼 우리의 몸뚱이를 이루는 물질인 거예요.

그런데 컵과 그릇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요. 그들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컵의 본질은 무언가 담는 것이고, 무언가 담으려면 비어 있어야 합니다. 컵의 본질은 유리나 플라스틱 같은 물질에 있는 게 아니라 비어 있는 성질에 있어요. 비어 있지 않으면 컵에 무엇을 담겠습니까. 아무 역할도 못 해요. 비어 있는 게 그릇의 본질입니다. 그 빈 공간을 ‘보이드(void)’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빈 컵에 커피를 따르면 커피잔, 물을 따르면 물잔이 되어 빈 공간이 없어져요. 그러면 이 컵은 더 이상 다른 것을 담을 수가 없지요. 이미 무언가 담겨 있으니 더 담을 수 없어요. 그게 ‘마인드(mind)’예요. 컵과 그릇 물질 자체는 ‘보디(body)’입니다. 만약 유리 컵이 깨지면 담고 있던 액체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보디도 마인드도 없어집니다.

하지만 텅 비어 있던 공간,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요. 깨졌나요? 없어졌나요? 아닙니다.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 비어 있는 공간은 저 은하계, 빅뱅이 일어난 저 우주와도 통하고 있지요.

상상해보세요, 우주도 비어 있으니까 우리가 달나라도 가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릇은 보디, 그릇을 채우는 욕망이 마인드. 그릇이 깨지면 담겨 있던 게 다 쏟아지듯 죽으면 육체도 욕망도 다 없어집니다. 깨지고 쏟아져도 남아 있는 빈 공간, 모든 그릇의 비어 있는 부분, 보이드. 그게 스피릿이에요.

스피릿은 우주의 것이지요. 내가 죽어도 내 안에 있던 우주의 스피릿은 남아 있어요. 그래서 영성이 중요한 거예요. 몸뚱이도 내 것이고 마음도 내 것이지만 그 영혼만은 내 것이 아니에요.

- 물음: 실제로 이 세상에서 그 우주와 통하는 특수한 공간을 컵 말고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나요?
- 네, 있지요. 바로 어머니의 자궁 속이에요. 그곳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어요. 세상과 통하는 곳에서 아기가 자라면 큰일이지요. 죽어요, 유산이에요. 그렇게 이 세상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이 열 달 동안 자궁 속에서, 우주의 보이드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러다 알아서 태어나요. 아이는 어머니가 낳으려 한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나오려 해요” 그러잖아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알아서 자라고 생일날까지 다 받아서 나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어머니의 자궁과 우주의 보이드가 통해져 있다는 증거예요. 이것을 플라톤은 ‘코라(Chora)’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거기가 바로 생명의 공간이요 창조의 공간입니다.

질문 14.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입니까?

보세요. 물질적 현실은 다 똑같아요. 각설탕은 모양도 맛도 똑같아요. 그런데 그 각설탕을 아이들에게 줘보세요. 어떤 애는 그걸 먹어버리지만 어떤 애는 그걸 가지고 놀아요. 바벨탑처럼 쌓거나 집을 짓기도 하고 레고처럼 임기응변해서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내요. 구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이들 저마다 달라요. 먹는 것은 같아도, 가지고 노는 것은 신기하게 다 달라요. 하나님도 신도 사각형의 흰 각설탕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구축하는 아이의 영혼, 마음속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적 영역은 지성의 영역이 아니라 영성의 영역입니다. 영성이 뭔지 모르겠으면 (인간욕망의) 가장 밑에 있는 ‘에로스(Eros·관능적 사랑)’의 사랑을 생각해봐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정말 죽어도 좋아!’라고 목숨까지 걸잖아요. 보다 높은 단계에 가려면 가장 아래 단계에서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사다리에 걸려 있는 지붕 너머는 허공이야. 여기까진 발을 디딜 곳이 있는데 위에는 비어 있는 칸이죠. 그거(허공)를 밟고 올라가느냐 안 올라가느냐는 것은 믿음밖에 없는 거지요. 디뎠는데 없으면 떨어져 죽는 것이고……. 디뎌서 올라갈 수 있다면 그때부터 상승하는 것이죠.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지하철 입구가 하나가 아닌 것처럼 종교도 여러 가지 종교가 있습니다. 불교면 불교, 기독교면 기독교라는 여러 입구가 있는 거지요.

어느 구멍이든 일단 들어가면 지하철처럼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열차 두 대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서로 다른 노선을 천국과 지옥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마치 해리포터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애초에 타려고 했던 노선과 전연 다른 미지의 통로가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법학 공부를 위해 떠났던 마틴 루터는 벌판을 지나다가 강력한 벼락을 만나 죽음의 공포를 느껴요. 광부의 아들인 그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에게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저는 수도자가 되겠습니다.”

두려움 속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기도와 약속, 바로 그것이 개신교에서 종교 개혁을 이룩하려고 했던 마틴 루터가 처음으로 위대한 하나님을 맞이하는 입구가 된 것입니다. 애초에 그는 종교 개혁을 하려던 꿈도 꿔본 적이 없고 오로지 법학 공부를 하려던 것인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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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어령 전 장관 삼성창업가의 질문에 답하다
  • 2022-01-05
  • hanse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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