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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 바뀐 것은, 유가족뿐입니다

  • hansewan
  • 조회 : 2519
  • 2016.04.08 오후 03:32

세월호 참사 이후 바뀐 것은, 유가족뿐입니다
[305호 메멘토 0416] ‘2014.4.16.’을 두 번째 맞는 세월호 엄마들
[305호] 2016년 03월 22일 (화) 16:09:35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 경기도 교육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고 유예은 양의 이모 박명선 씨 뒷모습. ⓒ복음과상황 이범진

세월호 참사 후 해를 두 번 넘긴다. 700일이 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진상규명을 위해 제정한 세월호 특별법 관련 상황부터 우선 짚어 보면, 지난 2월 임시국회 회기 종료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국회에 요청한 특별검사 임명 요청안이 (대통령의 애초 약속과는 달리) 사실상 무산됐다. 더불어 세월호 진상규명의 열쇠가 될 수 있는 선체 인양은 빨라도 7월말에야 가능한데, 정부는 특조위 예산을 6월말까지만 배정했다. 특조위 예산을 특별법이 시행된 시기(2015년 1월)보다 훨씬 늦게 배정해놓고도, 정작 활동 기간은 특별법 시행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특조위 활동 기간이 당초 정한 1년 6개월에 훨씬 못 미치는 상황이 돼버린 셈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세월호 참사를 사회적으로 기억하는 일도 녹록치 않다.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개학 시기에 즈음해서는 현재 열 개의 ‘기억교실’ 존치를 두고 희생자 학부모들과 다른 학부모들 간 갈등이 빚어지는 상황이 언론을 통해 부각됐었다. 재학생들이 열악한 교육환경에 내몰리는 원인이 곧 기억교실 때문인 것처럼 떠드는 다수 언론사의 보도 행태는 사회적 참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는 프레임이었다. 누구든 이런 보도를 접하다 보면 기억교실 존치가 마치 유가족들의 이기심과 연동된 개인의 문제쯤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실 희생자 학부모들은 이미 작년 여름방학 이후로 기억교실 존치에 대한 토론 제안을 경기도교육청에 지속적으로 해왔으나, 오히려 교육청이 성의 있게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과 재학생 부모들 사이 갈등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가 중재하고 경기도교육청이 기억교실 협의 테이블에 함께 앉았지만, 단원고 희생자 부모들은 더 구체적인 대책이 나올 때까지 (작년 중순 이후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해오던) 피켓 시위를 이어간다. 

세월호 2주기를 앞둔 지난 3월 초 경기도교육청 앞의 피켓 시위 현장을 찾아가 고 유예은 양의 어머니 박은희 씨(45, 안산 화정교회 전도사)를 만났다. (본지 302호[2016년 1월호]에 박 전도사의 편지글 “세월호유가족행전은 계속됩니다, 주님과 함께”가 실렸다.) 더불어 ‘세월호 엄마들’의 걸음을 따라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위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예은 이모, 성현 엄마, 애진 엄마(애진이는 세월호 생존자다), 예진 엄마, 주현 엄마, 시민. ⓒ복음과상황 이범진

기억교실, 
참사 원인 잊지 않게 하는 사회적 공간

단원고 희생자 학부모들은 기억교실 존치 문제를 놓고 작년 11월부터 평일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피켓시위를 시작했다. 교육청 직원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평일 오전 11시 반부터 1시 반까지 매일 5~10명 정도가 피켓을 든다. 한두 명의 시민도 드문드문 힘을 보탠다. 시위 시작 때부터 피켓을 든 예은 엄마는 세월호 참사와 최근의 기억교실 문제가 다뤄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답답함을 토로했다.

“참사 이후에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 토론이 일어날 줄 알았어요. 우리 교육은, 경제는, 정치는, 문화는,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돈의 논리에 경도되어 살아왔는지, 이제라도 돌이켜 가야 할 방향은 어딘지! 이야기하는 장들이 생길 줄 알았죠. 그런데 여전히 그대로예요.”

예은 엄마를 비롯한 세월호 엄마들은 특히 관할 교육청의 무관심한 태도에 기가 막혔다. 상처가 컸다. 시민들도 2년 째 매고 다니는 노란리본 하나를 교육청 직원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웠고, 교육청 1층 분향소 역시 너무 ‘깔끔’했다.

“여기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피켓 들고 서 있으면서 노란리본 단 사람 한 명 보기 힘들어요. 차에 붙이는 스티커도 거의 못 봤고요. 1층에 분향소가 마련돼 있는데, 거기는 향 피운 흔적이 없어요. 마침 교육청 직원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어서 ‘이 일에 책임을 느끼기는 하느냐’ 물었어요. 그랬더니 ‘공무원들은 노란리본 같은 거 못하고 다니게 압박이 들어온다’고 대놓고 말하더라고요. 그래도 여긴 다른 지역도 아니고 경기도교육청이잖아요, 단원고가 있는.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결의 같은 게 과연 이들에게 있었을까 싶어요. 오히려 빨리 잊히고 지워졌으면 하는 분위기 같아요.” 

예은 엄마는 혁신적인 교육과정을 시행하려는 이들이 준비해놓았다는 ‘세월호 교육’에 대해 “아이러니”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세월호 교육’에서 ‘기억교실’과 학부모는 거의 배제 대상이었다. 

“(경기도교육청의) 어떤 관계자분들은 참사 이후 ‘세월호 교육’이라는 주제로 자기들이 훌륭한 교육을 이미 준비를 해놨는데, 단원고 교실 문제로 실행 못해서 너무 아쉽다고 하더군요. 이건 너무 아이러니 아닌가요? 학생들이나 단원고 학부모들과 어떤 토론의 장도 없이 일방적으로 ‘세월호 교육’을 한다는 거잖아요? 최소한 단원고 내에서만이라도 이 참사를 통해서 부모들은 무엇을 느끼는지, 재학생들을 포함하여 학생들은 무엇을 느끼는지 먼저 이야기 나누는 대화의 과정이 있은 후에야 그런 교육도 실질적이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단원고 희생자 부모들이 끈질기게 ‘기억교실 존치’에 매달리는 이유는 ‘옳은 일’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한국사회가 참사의 ‘진짜 원인’들을 잊지 않게 하는 사회적 공간이니까. 재학생 학부모와 유가족들은 기억교실을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3월 이전하기로 잠정 합의했으나, ‘지난 2년간의 경험상’ 기억교실이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부모들은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

“기억교실은 여전히 우리 어른들을 숙연하게 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만듭니다. 계속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지요. 우리 가족들에겐 아픈 장소지만, 길게 봤을 때 우리 국민들에게는 참사 후 유의미한 공간이 됩니다. 이 문제를 놓고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 쌓여서 왔다면, 갈등이 생길 거리가 아닌 거죠. 지난해 여름방학 때부터 계속 제안하고 나름 가능한 플랜을 짜서 제안해왔는데, 정작 교육청은 무슨 겁을 먹었는지 뒤로 빠져서는 아무런 안도 내놓지 않고 그냥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었습니다. 뒤늦게라도 교육청이 대화 테이블에 들어온 건 다행이지만, 너무 많이 늦었죠. 저희가 제안했을 때 논의를 시작했다면 지금쯤은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구체적인 안이 나왔을 거고, 재학생들이 피해볼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언론은 재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불편을 겪는 상황이 마치 단원고 희생자 부모들 때문인 것처럼 초점을 맞췄다. 

“여론이 나쁘면 가족들 고통은 훨씬 커지고, 하루하루가 고통이에요. 우리가 여론에 못 이겨 포기하기를 바랐나봅니다. ‘자식 잡아먹은 부모’라는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여론에 밀려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욕이 쏟아져도 달게 먹으면서 계속 가는 거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책임자들이 제대로 처벌을 받고, 그 해결을 기반으로 우리 사회가 전보다 진보할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지금 이대로라면 답은 뻔해 보인다. (세월호 참사 직후 한국사회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북유럽으로 이민 관심이 증폭했었다.) 그동안 재발되어 온 참사를 통해 경험했고, 세월호 참사 조사 과정을 통해 재학습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세월호 유가족은 진실이 묻히도록 그대로 둘 수 없다. 포기할 수 없다. 예은 엄마를 비롯한 세월호 엄마들에게 이번 일은 결코 “확률을 따져서 할 일이 아니다.”

“작년에 단원고 부모님들이 어느 교수님의 인문학 강의를 함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엄마들이 이 싸움에서 이기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물었었죠. 교수님이 단호하게 ‘없다’고 하더군요. 엄마들이 얼굴이 벌게져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심지어 밖으로 뛰쳐나간 분도 있었죠. 교수님은 자신이 학자로서 거짓말 할 수가 없다고, 스스로도 너무 절망스럽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되물으셨죠. ‘그렇다고 어머님들 여기서 다 멈추실 거냐’고. 엄마들이 동시에 합창하듯 한목소리로 ‘아니요’를 외쳤어요. 마음속으로 ‘아 (희망이)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교회, 
여전히 세월호를 외면하거나 냉담한

고 유예은 양의 이모 박명희(50) 씨도 피켓 시위에 함께 나서고 있다. 그는 언론이 ‘세월호 사건을 얼마나 제대로 다루지 않는지’를 목격한 후로,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시민들에게 받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서명지를 국회에 전달하던 날 현장에서 수많은 기자들을 봤지만, 9시 뉴스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유가족들이 왜 그리 답답해했는지 알게 됐다. 그 직후 혼자 길에서 500여 명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서명을 받아왔고, 여기저기서 피켓을 들고 있다. 

교회는 이런 성도의 지난한 아픔에 아무런 공감도, 어떠한 연대의식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예은이 이모는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 개척 때부터 13년 넘게 헌신적으로 섬겨 오던 교회였다. 친밀했(다고 생각했)던 교회에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혼자 조용히 나왔다.” 

“나는 세월호 참사를 해결하는 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꽉 차 있는데, 교회 사람들은 관심이 전혀 없으니까, 매주 구역모임에서 할 얘기가 없었어요. 내 솔직한 감정들을 얘기하면 ‘저 얘기 또 하네…’ 하는 분위기였고, 나를 비롯한 세월호 가족들의 아픔에 전혀 관심이 없는 거예요. 10년 넘게 친했던 사람들하고의 관계라서 더 서운하고 상처를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나왔어요.”

특히 목회자에 대한 실망이 더없이 컸다. 절망에 가깝다. 

“ ‘요즘 얼마나 힘드세요’ 하고 짧은 위로라도 건네야 맞지 않나요? 내가 교회 옮긴다는 얘기가 구역장님 통해서 목사님 귀에 들어갔는데, (나한테는 전화도 안 하고) 교회 나간 지 얼마 안 된 남편한테 전화로 한다는 말이, ‘권사님이 자식 일도 아니고 조카 일에 그 정도이실 줄 몰랐다’였습니다. 그 말에 남편도 뚜껑이 열렸어요. 내가 다닌 교회의 민낯을 본 거죠. 그게 (10년 넘게 봐 온) 목사님과 마지막이었습니다.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으면서 웃으며 떠나려 했었지만, 그것도 못하고 그 주에 바로 교회를 안 나갔어요.”

갈 곳을 잃어버리고 나니 매주일 아침 눈을 뜨면 우울감이 차올랐다. 지인 소개로 새로운 교회에 출석하고는 있지만 ‘주일 아침 갈 곳이 없어 나가는 곳’, 딱 거기까지다.

“새로 다니는 교회도 큰 차이는 없지만, 애초 기대 없이 나가서 상처도 안 받아요. 50년을 교회 안의 하나님만 보고 살았는데, 이젠 교회 밖에 분명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어요. 구제나 선교헌금도 이젠 교회로 안 합니다. 오히려 교회 바깥에 하나님께서 돕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성현 엄마는 작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이는 도리어 기자에게 질문을 건넸다. “교회들은 세월호 가족들이 이 싸움을 계속 하는 걸 어떻게 바라보나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 예은 엄마. ⓒ복음과상황

하나님, 
끝까지 세월호 유가족 편에 함께하시는 

전도사인 예은 엄마도 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일했다면 “숨이 막혀서 뛰쳐나왔을 거”라고 했다.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 중에는 예은 이모처럼 주일에 갈 곳 잃은 분들이 꽤 있다. ‘정치적’이라는 소리를 하도 들어서 거의 쫓겨나듯 교회를 나온 분들도 있고, 새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어도 마땅히 다닐 만한 교회가 없어서 못나가는 분들도 있다. 박 전도사가 주일마다 안산 추모공원 옆 컨테이너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찾아오는 교회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게 된 건 그 때문이다. 주중엔 소규모로 성경읽기 모임도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예배드릴 곳을 잃은 유가족들이 적지 않아요. 그들이 다니던 교회의 태반이 공동기도 시간에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중보 이야기를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삭발한 어머님 중에는 ‘삭발한 채 교회 아이들 교사를 할 수가 있느냐’는 소리가 도는 통에 교회를 나오게 됐습니다. 아이들보다도 어른들이 문제지요. 2반 (허)다윤이는 아직 애가 배에서 나오지도 못했는데도(미수습), 교회에서 분향소로 와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어요. 최악입니다. 같은 교회 다니던 (박)시찬이 부모님도 그런 목사님 태도에 놀라서 나왔어요. 이런 분들이 많아서 우리끼리 주일예배도 함께 시작하고, 목요기도회도 생기고, 같이 성경 읽는 모임도 생겼습니다.” 

예은 엄마가 시작한 모임이지만 갈수록 다른 엄마들이 그 열심을 앞지르고 있다. 순영 엄마, 지성 엄마, 찬이네 부모님 등…. 특별히 예진 엄마는 교회 열심히 다니던 예진이를 만나기 위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배가 고프다.

“참 슬프지요. 모두 예배가 너무 고프니까…. 저는 최근 오셨던 대구 마가교회 서일웅 원로목사님 설교가 마음에 남아있어요. 찾아오는 손님들이 힘들까 봐 조심스러워서 엄마들이 울음을 많이 절제하는 편인데, 그날은 목사님이 아프고 힘든 자들의 우는 음성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이고 음성이라면서 부모님들 마음껏 우시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래, 이게 우리 하나님이지’ 했죠.”

성경 말씀을 읽을수록 단지 역사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똑같은 상황”인 것을 체감한다. 그리고 하나님 뜻을 찾는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신 다음에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고 또한 믿었지만, 그 전에 자신의 죽음이 먼저 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 뜻을 택한 거죠.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잔을 옮겨 달라 간청하셨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 뜻을 선택하셨잖아요.” 

예은 엄마는 “불의한 진실이 드러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그저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솔직히 우리 싸움이 이기리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기억교실을 지키는 일부터 크게는 진상규명까지도요. 하지만 불의한 진실이 드러나는 게 하나님 뜻이니까 계속 할 겁니다. 저희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특히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스스로, 예수님이 말씀하고 가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를 저희를 통해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 안산 화랑유원지 세월호 엄마 공방 모습. ⓒ복음과상황 이범진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신학도 재정립했다. 참사 초기 하나님에 대해 마음이 떠났던 다른 분들도 지금은 많이 돌아왔단다. 성경을 함께 읽다 보면 말씀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아프고 약한 자들의 편이라는 확신이 있다. 여전히 교회를 불신하고 실망도 계속 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확신은 참사 이전보다도 오히려 공고해졌다.”

“유가족들 중에 어떤 분이 해방신학 책을 읽고서 ‘하나님이 우릴 해방시켜준다는 게 이거냐, 이게 무슨 해방이냐’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이 우릴 해방하신다는 게 우리한테 문을 활짝 열어주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도록 문고리라도 잡고 돌리게 하시는 것 같다’고 답했죠. 길은 이미 예수님이 보여주셨고, 우리가 그 길을 걷기를 결단하는 일만 남은 거라고요. 그래서 끝이 오기 전에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살아생전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가는 것이 곧 영생을 믿는 믿음이라고요. 영생이란 죽은 후에 호의호식 하는 게 아니라 내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어진다는 확신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간다는 의미에서 영생인 거죠. 제 신학은 예은이를 보내고 이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싸울 일은 없어요.”

 

 

 

 
▲ 가족대기실에서 세월호 리본을 만들고 있는 엄마들. ⓒ복음과상황 이범진

세월호 엄마들, 
2주기를 앞두고 리본을 만들며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피켓 시위를 마치고 안산 추모 분향소로 돌아온 엄마들은 점심을 먹고 각자 일정을 보낸다. 분향소에 들른 후 유가족 대기실에 들어가 보니 예은 엄마는 회의 참석차 나갔고, 오전부터 가족 대기실에 와 있던 순영 엄마와 경기도교육청에서 피켓을 들었던 예진 엄마가 모여 앉아 세월호 2주기를 앞두고 시민들에게 나눠줄 노란 리본을 만드는 중이었다. 지성 엄마도 곧 함께 앉아 세월호 공방에서 만들던 퀼트 천을 꺼내 들었다.

  
▲ 지성 엄마. "엄마 공방은 언젠부턴가 세월호 가족이 운동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라고 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지성 엄마가 말을 꺼낸다. 
“우리 얼굴이 처음보다 좀 온순해진 것 같어.”
예진 엄마가 말을 받는다. 
“난 안 온순해졌어. 처음엔 이게 아이 죽음만 너무 슬펐는데 지금은 좀 단단해졌다고 할까? 오늘은 날씨가 좀 풀려서 티셔츠 찾아 입으려다 보니까 옷장에 옷들이 다 세월호 옷밖에 없더라.”
옷 이야기는 최근의 텔레비전 방송 이야기로 흐른다. 예진 엄마는 어느 아이돌 가수가 화면에 끌고 나온 보라색 캐리어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예진이가 보라색 캐리어 들고 갔거든, 텔레비전에서 보라색 캐리어 보니까 또 가슴이 아파. 수학여행 가기 전에 옷 산다고 같이 중앙동도 몇 바퀴를 돌았는데….”
지성 엄마가 이야기를 받는다. 
“난 요즘 방송에서 우리 애랑 생긴 거나 성격 비슷한 애 나오면 마음이 가. 특히 성격 비슷한 애 발견하면 걔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
예진 엄마도 순영 엄마도 맞장구를 친다. 이번엔 순영 엄마가 묻는다.
“다른 자식이 세월호 일로 엄마가 자리 비우니까 서운해 하진 않어들?”
예진 엄마가 말을 받는다.
“난 미리 양해 구해놨어 아들한테. 엄마는 네 엄마이기도 하지만 누나 엄마라서, 지금은 누나한테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이때 지나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잖아.”




 hansewan

2016-04-08 15:42

예전에는 해마다 4월이 되면 4.19의 희생정신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4.16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이 생각납니다.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 과정을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서로 다르고 의견도 다를수 있지만, 선진국이란 인명을 소중히 여기며, 억울한 일을 끝까지 밝혀주어 마음을 위로해야 선진국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은 사회 구석 구석의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믿음을 세워주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달라지길 기도드립니다. 2년전 팽목항을 방문했을 때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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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08
  • hanse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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